시 30:11∼12, 고후 5:17
춤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춤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고 일컫는 마가렛 두블러 교수는 ‘창조적 예술 경험으로서의 춤’ 이란 책에서 춤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과거의 이런 저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에너지를 그냥 방치하면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지만, 이 만들어진 에너지를 생기를 띠게 하는 힘으로 만들기 위해 질서와 조화라고 하는 율동의 원칙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춤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춰볼 때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한다는 말씀은 과거에 경험했던 이런 저런 슬픈 사연들을 그대로 방치하면 혼란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과거의 모든 사연들이 합력하여 조화로운 질서가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에너지로 전환시킨다면 신바람 나는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원을 가지고 우리는 약속의 땅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새해가 되면 누구나 소원이나 계획을 갖고 출발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의 슬픔이 변하여 현재의 춤으로 전환되려면 새 마음이 필요한데, 여기에 걸맞은 새로운 ‘피조물다운’ 마음을 갖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자극 속에 옛 사람을 벗어버리겠다고 결단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작심삼일’ 되어 또다시 옛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새로운 ‘피조물다운’ 마음일까요? 과거를 잊어버리기만 하면 새로운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줄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주관자는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이기에 성경은 곳곳에서 “과거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명령함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물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를 잊어야 합니까, 아니면 기억해야 합니까? 두 가지는 상호 충돌의 말씀으로 보일 뿐 실제 한 말씀입니다.
“앞 푯대를 나아가기 위해서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성구의 초점은 ‘과거를 잊으라’가 아닌 ‘앞 푯대를 향해 전진하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나를 뒤에서 끌어당기는 과거를 잊어버리라는 것이기에, 소원의 항구라는 앞 푯대를 향해서 질주하는 나에게 탄력을 주는 과거의 역사경험이라면 이제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물론 주님이 용서해 주신 죄악은 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기억하지 않으시는 죄악에서의 해방인 것이지, 과거에 나로 하여금 죄악의 함정에 빠지게 했던 연약함이나 부족함은 기억하면서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 달궈진 쇠붙이를 쳐서 새로운 물건이 되는 것처럼 2012년에 걸맞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과거의 자물쇠에 맞는 열쇠로는 미래라는 보물창고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기존의 열쇠를 용광로에서 녹여서 새해 자물쇠에 맞게끔 열쇠를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열쇠 모양은 바뀌지만 구리와 아연의 합금인 황동 혹은 니켈의 합금인 백동이라는 열쇠의 속성은 여전히 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열쇠를 부패케 한 더러운 것(죄악)은 사라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말씀이 의미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미래를 점령하십시오. 승리하십시오.
김권수 목사 동신교회
[오늘의 설교] 슬픔에서 춤추는 인생으로 거듭나라
입력 2012-02-17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