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거리의 판사들

입력 2012-02-16 17:51


사법시험에 붙은 합격자들에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나중에 법관이 되어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 높은 권력에 머물지 않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겠다니, 얼마나 갸륵한 생각인가.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법관이라는 직업을 잘못 알고 있다. 법관은 법의 해석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말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다면 판사가 아니라 사회복지사가 되거나, 돈을 많이 벌어 자선사업을 해야 한다.

법관에 대한 오해는 오랜 법의 역사에 닿아 있다. 사람들은 분쟁해결 수단으로 사법제도를 만들면서 판관은 현인(賢人)이 맡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실과 정의를 찾는 데는 경륜과 지혜가 필요해서다. 그러나 솔로몬 같은 이는 많지 않다. 오히려 독단에 치우치거나 예단을 가진 판관은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늘 부패를 가져오니까.

나꼼수 부러우면 法服 벗어라

이런 이유로 재판은 법관중심주의에서 당사자중심주의로 옮겼다. 비록 당사자 간 힘의 불균형이라는 약점이 있으나 법관 재량에 맡기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이었다. 지금처럼 형사재판에서 검사와 피고인이 공방을 벌이고, 민사재판에서 원·피고가 쟁점을 놓고 다투는 것은 어느 날 발견한 제도가 아니라 오랜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영의정 윤대형이 월이를 묶어놓고 직접 심문하는 장면을 보면 법관중심주의의 폐해를 알 수 있다.

이후 판관은 재판의 주인공 자리를 내놓았다. 게임으로 치면 심판 정도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물론 심판도 게임에 적잖이 영향을 미친다. 경기 중간중간에 휘슬을 울려 흐름을 끊어놓거나, 반칙하는 선수를 징계한다. 그러나 심판이 선수가 아니듯, 판사도 당사자가 아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배려할 수 있을지라도 직접 도울 수는 없다.

법관이 보수적이어야 하는 것은 직업의 숙명이다. 법이 기술을 뒤쫓아 가듯, 사법이 입법이나 변혁운동을 앞서갈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의 주체가 아니라 판결로 규범을 지탱해야 하는 가치의 버팀목이다. 판사들이 그렇게 정치적 발언을 하고 싶고, 국가원수를 욕하고 싶으면 법복을 벗으면 된다. 나꼼수 멤버들을 보라. 대놓고 대통령을 욕해도 아무도 뭐라지 않는다.

이런 현실이 답답했던 것일까. 판사들이 거리로 뛰쳐나온다. 엄연한 조직의 구성원이면서도 프리랜서마냥 직접 국민에게 하소연한다. 그것도 사법권 유린과 같은 본질적인 사안이 아니라 다분히 개인적인 민원을 들고서 세상을 향해 화살을 쏘아댄다. 평점을 낮게 받은 낙제생이 양심수인 양 행세한다거나, 소셜네트워크(SNS)에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자 ‘합의내용 비공개’라는 법관의 금과옥조를 깨버린다.

이들은 아직도 자신을 정의의 화신, 아니면 광야에서 진실을 외치는 선지자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법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법 서비스다. 예전처럼 전지전능한 심판자가 아니라 소송이라는 게임의 성실한 관리자가 되라는 것이다. 영화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은 법관들이 서비스 정신에 불충한 자세를 지적했기에 호응을 얻는다.

서재에 불 밝히고 책 읽을 때

판사들은 이제 어떤 방식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을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재판이라는 게임이 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축구에서 가장 많이 뛰는 사람은 미드필더가 아니라 심판이라지 않는가.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판례를 익히고, 저널과 논문을 읽다보면 SNS에 미혹될 수가 없다. 이제 거리의 판사들은 집으로 돌아가 서재에 불을 켤 시간이다. 책을 읽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