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길목지킨 불문학자의 시선… ‘잘 표현된 불행’
입력 2012-02-16 17:17
잘 표현된 불행/황현산/문예중앙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고 시작되는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 자칫 간과할 수 있는 점은 과연 광야에서 닭이 울었느냐에 대한 의문이다. ‘들렸으랴’라는 말은 ‘과연 들렸겠는가’라는 의미로 해석돼 닭 울음소리를 부정하는 말로 간주돼 왔다. 그러다 1986년 김종길 시인은 “그건 ‘들렸으리라’의 축약형이며 이 닭 울음소리가 ‘까마득한 날’에 대한 상상을 더욱 어울리게 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두 해석은 어느 한쪽도 다른 한쪽을 설복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황현산(67) 고려대 명예교수는 닭 울음소리를 부정하는 쪽의 손을 들어주며 이렇게 지적한다. “까마득한 날 하늘이 처음 열릴 때 어디선가 들렸으리라고 생각될 만한 저 ‘하늘 닭의 울음소리’를 시인은 부정하고 있다. 천지가 단지 그렇게 열렸을 뿐 어찌 지엄한 닭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겠는가.”(694쪽)
황 교수는 ‘말과 시간의 깊이’ 이후 10년 만에 묶어낸 이 비평집에서 1920∼1930년대부터 최근까지 한국 현대시의 궤적을 한눈에 조망하고 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시차를 두고 쓰인 글들이지만 “내 생각이 시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내 삶과 크고 작게 연결된 제반 문제를 시와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그의 말처럼 시에 대한 일관된 탐구가 글의 통일성을 보탠다.
“나는 늘 시에 대해서 말하고, 시와 말을 하면서 일상에 쫓기고 있는 한 마음의 평범한 상태가 어떻게 시적 상태로 바뀌는가를 알려고 애썼다. 어떤 사람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기억을 기억 속으로 다시 불러오는 기술이 시라고 말했지만 나에게 시는 말 저편에 있는 말을 지금 이 시간의 말 속으로 끌어당기는 계기이다.”(6쪽)
1부엔 늘 문학 현장을 지켜온 저자의 통찰력 있는 시론들이 묶였다. 2부에서는 한용운 김소월 이상 윤동주 김수영 등 작고 시인들의 작품 세계를 분석했다. 3부에서는 고은부터 이성복 최승자 이문재 김근 시인까지 최근 몇 년간 출간된 시집에 대한 해설과 비평이 묶였다. 마지막 4부는 1999∼2000년 월간 ‘현대시학’에 연재된 글들이 담겼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