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세상’ 몸으로 엿 본 印尼의 속살… ‘적도를 달리는 남자’
입력 2012-02-16 17:19
적도를 달리는 남자/김형준/이매진
현지조사라 일컫는 문화인류학적 조사를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그건 라포(rapport)라는 개념인데 조사 대상자와 나누는 친밀한 관계, 접촉, 교감을 일컫는다. 오지의 알려지지 않은 부족을 연구하려면 우선 부족사회의 일원이 될 수밖에 없다. 몸으로 직접 부딪혀서 얻어낸 정보만이 진가를 발휘한다.
1992년 여름 첫발을 디딘 이래 2010년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인도네시아에 체류하면서 현지조사를 수행한 김형준(47)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의 경험담은 황당함과 낯섦의 인식론적 커튼을 걷어내고 타 문화에 대한 세밀한 시선을 보여준다.
첫 체류지는 자바 전통 왕국의 수도인 족자카르타(이하 족자). 하숙집에서 첫 밤을 지샌 뒤 맞이한 아침, “화장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지만 주인아주머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계속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집안에 화장실은 없었다. 모두들 밖에서 해결한다는 것이다.
“상황을 악화시킨 점은 이곳 식단이 밥, 코코넛 국, 그리고 1∼2개의 반찬으로 매우 단출하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단이 가져온 결과는 배고픔이었다. 밥을 먹고 1∼2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허기가 찾아왔다. 여기에는 이곳 사람과 똑같이 살아보겠다는 내 태도 역시 한몫했다.”(49쪽)
배고픔은 상황을 역전시켰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마을의 여러 모임과 행사에 부지런히 참여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는 더욱 깊게 현지인들 사이로 스며든다. 인도네시아 고유 의상인 바틱에 대한 코멘트는 흥미롭다. “바틱은 사람의 지위를 흐릿하게 만드는 일종의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마력을 지닌 듯하다. 바틱은 지위 차이의 외적인 표현 정도를 완화할 수 있고, 의복의 민주화를 일정 정도 가능하게 하는 듯하다.”(65쪽)
우기와 건기라는 계절의 반복에 기인한 인도네시아 전통 사회의 시간관은 순환론적 성격을 띤다. 그건 서구에서 확립된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시간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일례로 전통 자바사회에서 시간은 35일 단위로 순환하는데, 누군가를 방문하려다 하지 못했다면 35일을 기다렸다가 방문하는 식이다.
자바 섬은 부계사회인 한국과는 달리 양변적 출계, 즉 아이가 부모 중 한쪽 편이 아닌 부모 모두에 속한다는 전통이 존재한다. 이로 말미암아 아이 이름을 지을 때도 부모의 성은 들어가지 않는다. 성이 없는 단일 이름 짓기의 전통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한 원로 사회학자의 회고담은 자바식 단일 이름이 가져올 문화 간 충돌 양상을 보여준다. 그 학자는 ‘셀로수마르잔’이라는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권을 처음 발급받으러 갔을 때 자신의 이름을 성과 이름으로 나누라고 강제 받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셀로’와 ‘수마르잔’으로 나누며 씁쓸함을 느꼈다고 한다.”(115쪽)
낯섦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감각을 통해 우리 자신을, 또 타인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이지만 문체가 주는 신선함은 한 권의 수기를 읽는 느낌을 갖게 한다. 예컨대 이런 문장. “서글픔. 입국 카운터를 지나면서부터는 공식적으로 인도네시아 땅이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즉각적으로 접하게 되는 모습은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격차다. 나는 단 한 번도 있는 자 편에 속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서글픔은 나 자신에게 적용되는 감정이기도 하다.”(34쪽)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