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인들의 서재에서 인생을 엿보다… ‘살아 있는 도서관’

입력 2012-02-16 18:30


살아 있는 도서관/장동석/현암사

책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온 우리 시대 지성들의 독서 편력을 들여다 보면 이들이야말로 앎과 삶을 일치시킨 한 권의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출판평론가 장동석이 만난 지성들은 80대 백발의 노(老)철학자 박이문에서 40대 인터넷 시대의 서평가로 꼽히는 이현우(로쟈)까지 세대와 정체성을 달리하는 23명의 지식인들이다.

그 중 한 명인 고전평론가 고미숙(52)의 일상은 책과 공부다. 지난 10년 동안의 공부가 1998년에 그가 만든 서울 수유동의 작은 공부방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필동 깨봉빌딩에 터를 잡은 ‘감이당’이 그의 서재이다. 지난해 그가 출간한 ‘동의보감-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의 책날개에 붙은 ‘굿바이, 수유 너머’라는 글에 따르면 ‘감이당’은 ‘몸 삶 글’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인문의 역학을 탐구하는 ‘밴드형 코뮤니타스’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전도사를 자처하는 그는 “고전의 지혜는 현대인들에게는 낯설고 새로운 사상의 길이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언어 지도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국 문학가 루쉰과 동의보감도 그의 공부에서 빼놓을 수 없는 텍스트다. “루쉰의 삶이 더욱 빛나는 이유는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만큼만 글을 썼다는 사실이지요. 루쉰의 삶과 문학에 천착하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11쪽)

철학자인 김영민(54) 한신대 교수는 휴대전화가 없다. 이메일만으로 소통한다. 2008년 그가 펴낸 ‘동무론’엔 이런 대목이 있다. “근년의 타자들은 모두 내게 ‘핸드폰’을 지닌 자로 다가와서 움직인다.” 현대인의 정체성에 대한 명쾌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휴대전화로 대표되는 모든 매체를 무조건 갖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휴대전화라는 체계가 인도하는 지점을 정확히 알고, 상호접점을 잘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는 것이다.

미국 유학 시절, 전미학생인명사전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던 그는 스스로를 대학 교수와 스피노자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지식인으로 규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일반적인 매체, 즉 주민등록증과 신용카드, 통장, 자동차를 포기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내도 중요한 매체인데 저는 아내도 없다’는 대목에서는 놀라움마저 일게 했다.”(71쪽)

서울 통인동 인왕산 자락에 있는 ‘길담서원’에 들어서면 서가의 책을 정리하는 서원지기 박성준(72)을 만날 수 있다. 20평 남짓한 아담한 책방 인근에는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고 ‘추사 김정희가 사시던 곳’이라는 표석도 있다. 그 사이에 길담서원은 빈 그릇처럼 놓여 있다. “2008년 2월 25일에 ‘오픈’했지만 ‘열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고 ‘열어가고 있다’고 현재진행형으로 말합니다. 길담서원이 향기로운 공간이 되는 것. 길담의 물맛이 좋아지는 것은 이곳에 지금 오시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습니다.”(131쪽)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선배로부터 빌려 읽은 금서 몇 권이 화근이 돼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면서 13년 6개월 동안 징역을 살았던 그는 1981년 출소해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소장으로 있던 한국신학연구소의 학술부장으로 있으면서 80년대 진보적 기독교 운동에 일조를 했다. 이후 일본 릿쿄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평화학을 연구했다. 2000년 7월 귀국해 성공회대 NGO대학 겸임교수를 거쳐 이제 서원지기로 살고 있는 그는 꼭 읽고 싶은 철학책을 원전으로 읽기 위해 요즘 프랑스어와 독일어 공부에 푹 빠져 있다.

한의사 이유명호(59) 원장의 진료실엔 한의학 서적 대신 만화책이 즐비하다. 서울여한의사회 회장을 지냈고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등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그의 단골 서점은 서울 마포에 있는 한의원 근처의 동네 서점이다 이 동네 서점을 살리기 위해서 얼마를 할인해준다는 인터넷 서점은 절대 이용하지 않는다.

사실 만화책은 그가 한의원을 찾는 이들에게 치유책으로 제시하는 방편이다. 성생활과 불임에 관해 묻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돕기 위해 홍승우 작가의 만화 ‘야야툰’을 처방해 준다. 밥을 잘 안 먹는 자녀가 고민인 부모에게는 ‘미스터 초밥왕’을 건네준다. 그가 요즘 읽고 있는 만화는 ‘헬프맨’. 실버사회로 전환된 일본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우리 현실을 반추할 수 있어서다. 경기여고 시절 교내 독서클럽 ‘스테인리스’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책을 읽었던 경험은 이제 40년이 지났는데도 스테인리스처럼 녹슬지 않고 빛나고 있다.

이현우(44) 한림대 연구교수.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소년소녀문학전집을 발견하고 경탄했던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예기치 않은 폐결핵에 걸렸지만 그때까지 읽은 작가들 가운데 폐결핵으로 죽은 작가가 많다는 사실에 은근히 자부심까지 느꼈다.

대가급 작가의 책을 읽기 위해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 진학한 그는 지금도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권한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책을 읽을 자유였다. 그리고 분명 책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나는 가끔 책이 인간보다 위대해 보인다.”(260쪽)

이 책에 등장하는 한국의 지성들이야말로 ‘걸어 다니는 책’이자 ‘살아 있는 도서관’임에 틀림없다. 좋은 책은 사유의 지도를 다시 그려준다. 그 지도는 우리의 일상을 이전과는 아주 다른 길로 이끈다. 책을 읽자. 올해는 독서의 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