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임미정] 오뎅 한 그릇
입력 2012-02-15 20:11
가끔 학생들과 가는 분식집이 있다. 대학로에 있는 조그만 곳인데, 떡볶이와 오뎅이 일품이다. 다섯 평쯤 되는 작은 가게이지만 대여섯 명의 아주머니들이 일할 정도로 손님이 많다.
워낙 장사가 잘되다 보니, 주인은 손님 나이를 불문하고 퉁명하게 “여기 앉아요” “빨리 주문하세요” 등 거의 명령조로 가게 안의 교통정리를 한다. 그곳에 가면 교수나 학생이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상관없이 주인아주머니가 왕이다. 맛있기도 하지만 그런 활기찬 분위기가 맘에 들어 자주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 남편과 함께 그 분식집을 방문했다. 맛집을 찾는 남편에게 이 집의 오뎅 맛을 자랑한 터였다. 그날따라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아주머니는 오뎅과 함께 큰 국물 그릇 하나를 우리 앞에 놓았다. 그리고 국물을 한 그릇 더 원하느냐고 물어 본다. 고맙다고 대답했다. 나는 남편이 내 앞에 먼저 놓아 준 큰 국그릇을 먹기 시작했고 곧 아주머니가 작은 국물 그릇을 서비스로 가져오셨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갑자기 내가 먹기 시작한 큰 그릇을 남편에게 주고, 내게는 작은 그릇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었다. 너무나 친절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다. 십중팔구 집안의 가장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정서니까. 하지만 내가 벌써 먹기 시작했는데도 이 아주머니는 큰 그릇은 남자에게, 작은 그릇은 여자에게 가야 한다고 나름의 교통정리를 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국그릇을 옮기는 중에 아주머니의 표정과 대화는 참 친근한 것이었다. 그분의 태도가 내가 몇 번 방문한 것 중에 가장 따뜻해서, 표정에 동화된 나는 그저 기분 좋게 대화를 하였다. 그분의 행동은 순수한 호의였을 테니까.
지금 생각해도 국그릇 교체 사건은 흥미롭다. 평소 누가 손님으로 오든지 당당하게 대하던 아주머니의 무의식적 행동은 어떤 생각에서 나온 것일까.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분식집에 중년의 부부가 왔으니까 남편에게 서비스 정신이 집중되었을까. 남편에게 잘 해주는 것이 우리 둘 모두에게 친절을 베푸는 거라는 생각을 했을까. 그렇다면 내가 국그릇을 빼앗겨서(?) 얼떨떨하기보다는 여자로서 당연히 그런 행동에 동의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 쪽의 심리를 분석해본다면, 난 내 국그릇을 빼앗긴 순간 “어, 이게 뭐지?” 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친절한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고 우리가 특별 서비스를 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가졌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내 옆 사람이 가족이 아니면서, 나와 같은 나이이거나 나보다 젊은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기분이 썩 좋진 않았을 것 같다. 우리 둘에 대한 아주머니의 호의보다, 나에 대한 푸대접이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참으로 복잡한 사회적 맥락과 단순한 친절이 함께 녹아 있는 오뎅 한 그릇이었다.
임미정 한세대 교수·하나를위한음악재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