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울밑에 선 봉선화

입력 2012-02-15 18:49

‘봉선화’는 난파 홍영후가 3·1독립운동 직후 작곡한 바이올린 곡 ‘애수(哀愁)’가 원곡이다. 문학에도 조예가 있었던 난파는 1920년 4월 단편소설집 ‘처녀혼’을 발간하면서 서장에 친필로 그린 애수 악보를 넣었다. 그가 1925년 펴낸 ‘세계명창가집’에 이 멜로디가 ‘봉선화’란 제목 아래 작사자가 김형준이라고 표기돼 있다. 피아니스트 김원복의 부친으로 난파보다 나이가 많았던 김형준은 이웃에 살면서 친분이 두터웠다. 그의 집엔 봉선화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봉선화는 난파가 1931년에 발행한 ‘세계명작 가곡선집’에도 실려 있다. 1927년 7월 소프라노 김영숙이 부른 노래가 방송되기도 했고 1932년과 1937년 일본 축음기 회사에 의해 음반으로 발간됐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봉선화가 민족의 심금을 울리는 국민가곡이 된 것은 일제의 횡포가 더 악랄해진 1942년 천재 소프라노 김천애 때문이었다.

도쿄 무사시노(武藏野)음악학교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천애는 그해 열린 전일본신인음악회에 한복을 입고 나가 노래했다. 앙코르가 계속되자 그는 네 번째 곡으로 봉선화를 불렀다. 음악회가 끝난 뒤 한국 청년들이 무대 뒤로 찾아오자 그는 도쿄 한국YMCA로 가 밤새 울면서 봉선화를 함께 불렀다고 한다. 그해 가을 귀국한 김천애는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에서 독창회를 할 때마다 봉선화를 불렀다. 일본 경찰이 압력을 넣었지만 정식 공연목록에는 넣지 않고 앙코르 때 부르는 식으로 노래를 계속했다. 이 때문에 그는 여러 차례 경찰에 연행됐고 봉선화는 결국 금지곡이 됐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지난 13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플루트로 봉선화를 연주했다. 그는 연주를 마친 뒤 “노랫말 속 가을바람은 일본 침략을 의미하고 떨어진 꽃송이는 위안부 피해자 같다”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봉선화 연주는 난파의 친일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난파는 일제 말기 ‘조선음악협회’ 등 친일단체에 가입했고 친일가요 수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고초를 겪었고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그의 본심을 확인하긴 어렵겠지만 어쨌든 그의 만년은 봉선화 2절 가사를 생각나게 한다.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