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최상현] 경박해지는 정치 혁신
입력 2012-02-15 18:47
눈은 순백의 겨울 꽃이다. 눈은 허공에서 흰 꽃잎이 흩날리듯 내린다. 바람이 조용할 때 눈은 나비 떼의 군무를 추며 사뿐히 땅에 내려앉는다. 그럴 때 추운 겨울은 푸근하게 느껴지며 사람의 영혼에는 평화가 깃든다. 내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거친 세상 전체가 평화로워 보인다. 눈이 와도 그런 눈만 오면 좋겠지만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칠 때 눈은 사나운 눈보라가 된다. 이 매섭고 사나운 풍설을 뚫고 사람은 나아가지 못한다.
거친 풍설의 계절에 사회경제적 약자들은 더욱 두렵다. 어려운 생활을 이끌고 앞으로 나갈 힘이 없기 때문이다. 봄바람이 불고 꽃이 핀들 그들의 마음에서 한파를 가시게 하기는 쉽지 않다. 선거철이 돌아오는데도 그렇다.
역대 정부의 사회복지 시책과 관심도 그들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부자들의 자선은 악어의 눈물에 불과하다. 선출직 권력자들과 약자를 따뜻이 부축해야 할 관료들은 약자에 대해 배려와 지도력을 발휘하기보다는 권력을 가진 사람끼리의 특권적인 생활에 정신이 없다.
정략적인 포퓰리즘은 춤을 추지만 진정성은 보이지 않는다. 정약용은 정조 임금의 하교로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 북부 지역을 돌면서 도탄에 빠진 민생과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시로 엮어 임금에게 고변했었다. 그것이 ‘교지를 받들고 고을을 순찰하면서 적성의 시골집에서 지음(봉지염찰도적성촌사작: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이라는 시다. 참담한 민생현장에 대한 가슴 미어지는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에 충실한 기술이지만 임금의 선정을 칭송하는 구절은 한 마디도 없다. 그 정직한 우직함이 임금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
총선을 앞둔 정치 마당이 김시습이 말한 ‘작서(雀鼠)의 뜰’과 같다. 뿐만 아니라 온갖 사회적 소통의 수단과 통로에 ‘작서의 뜰’에서와 같이 참새나 쥐의 찧고 까부는 짹짹거림이 가득하다. 높이 나는 대붕(大鵬)은 잡새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작서의 뜰’은 갈수록 더 시끄럽고 촐싹거리는 참새나 쥐들의 낙원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이 같으므로 정직하고 우직하며 출중한 애민(愛民)의 실학자 정약용과 같은 대붕의 동량지재(棟梁之材)를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
정약용은 한 편의 시로 구중궁궐에 갇혀 민초들의 애환을 전혀 몰랐던 임금의 심금을 울리고, 권력을 사유화해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말거나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정쟁에만 골몰하던 권문세도가들에게 엄중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눈은 신비하다. 눈은 그 자체로도 신비하고 내리는 모습도 신비하며 뽀드득 뽀드득 발밑에 밟힐 때 나는 소리도 신비하다. 그런데 눈은 왜 오는가. 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자연현상에 관한 물리적 지식, 즉 피직스(Physics)의 극히 일부에 머문다. 그 물리적 지식의 베일 뒤에 숨은 형이상학과 섭리의 영역인 메타피직스(Metaphysics)에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머리 아프게 그런 데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눈은 그냥 눈으로 보아 마냥 즐겁고 신비하다. 그러나 메타피직스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회는 점차 경박해지며 사람들은 탐욕의 포로로 변해 간다. 그런 사회는 결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정치 혁신, 공천 혁명’이 정당들의 화두가 됐다. 결국 정치의 패러다임과 시스템을 바꾸고 인재를 구하는 것이다. ‘작서’들이 찧고 까부는 ‘작서의 뜰’을 만들어 놓지 않기를 기대한다. ‘피직스’에만 매달리지 말고 ‘메타피직스’도 생각하는 두터운 발상을 동원하라는 것이다.
최상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