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윤복희 (12) 아일랜드의 기적… 공연후 이동 2분만에 대폭발이
입력 2012-02-15 20:24
코리언 키튼즈가 미국 CBS-TV의 ‘봅 호프의 크리스마스 스페셜’ 출연 제의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세계적인 스타들만 초대되는 대형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건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죠. 그런데 그게 현실이라니…. 저는 그야말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매스컴에서 취재경쟁을 시작했습니다. 코리언 키튼즈가 어떤 그룹인지, 윤복희가 어떤 가수인지에 대한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그야말로 스타 탄생의 순간이었죠. 그러자 갑자기 고생스러웠던 지난날이 눈앞을 스쳤습니다. 의지할 데 없어 길거리를 헤매면서 겪어야 했던 추위와 배고픔, 작은 몸으로 온전히 견뎌야 했던 처절한 외로움과 서러움 등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습니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아마 기쁨의 눈물이었을 겁니다. 희망의 눈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은혜의 눈물이었을 겁니다. 깊은 어둠을 지나 빛을 본 듯했을 겁니다. 맞습니다. 어둠이 없었다면 빛이 온들 그게 얼마나 황홀한 은혜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어쨌든 우리는 봅 호프의 크리스마스 스페셜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출연자 및 스태프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CBS-TV 스튜디오에 모여 두 달여 동안 맹연습을 했습니다. 이어 1965년 11월, 우리는 미국 정부의 특별기를 타고 전쟁터인 베트남으로 날아갔습니다. 봅 호프를 포함한 300여명의 대규모 공연단이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한 달 넘게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태국 방콕에 숙소를 두고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위문공연을 한 것이죠. 공연을 마치면 여기저기 야전병원을 다니며 부상병들을 위로했습니다. 전쟁터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고 느꼈습니다.
하루는 공연을 앞두고 있는데 누군가가 분장실을 찾아왔습니다. 미군 헌병과 함께 서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는 제 손을 잡고 고맙다면서 한국 껌 한 통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묘한 감정이 일면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가슴속에 숨을 죽이고 있던 진한 그리움이 고개를 쳐든 겁니다. 여러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무엇보다도 필리핀 공연을 떠나기 전 교제했던 미스터 유가 생각났습니다. 2주 후면 돌아간다던 길이 4년 가까이나 됐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한국인데…’
봅 호프의 크리스마스 스페셜은 그해 성탄절에 CBS-TV를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됐습니다. 방송이 나간 이후 코리언 키튼즈에 대한 대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몸값이 엄청나게 뛴 것이죠. 이제 어디를 가든 누구나 코리언 키튼즈를 알아봤습니다. 전 세계에서 공연 문의가 밀려왔습니다.
그때쯤 아일랜드에서 가졌던 공연을 특히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아일랜드는 구교와 신교가 치열하게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갔을 때는 휴전 중이라 양측 사람들이 같이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저는 아일랜드 민요 ‘아 목동아!’를 불렀습니다. 열창을 하자 관객들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엔 신교 군인과 구교 군인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정말로 감격적이었습니다.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고 있는데 강력한 폭발음이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우리가 공연했던 건물이 완전히 폭파됐습니다. 2분 정도만 지체됐어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죽었을 것입니다. 아찔한 마음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나는 한동안 멀리서 솟구치는 검은 구름을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에선 순간순간이 저를 주님의 품으로 이끄는 과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인생의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널 때마다 주님의 어깨를 의지했음을 알게 됩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