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불가능한 가능성

입력 2012-02-13 19:25


미국 유학시절에 사귄 가까운 친구 중에 유대인 친구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그 친구가 내게 권한 엘리 위젤(Elie Wiesel)의 자전적 소설 ‘밤’이란 단편집을 참으로 감동적으로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서 주인공은 순수하게 행복했고 종교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어린 시절 나치에 의해 가족과 함께, 그리고 다른 수천, 수만 명의 유대인들과 더불어 아우슈비츠로 추방돼 그 악명 높은 유대인 집단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잃고 병들어 쓰러져 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해야만 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다른 유대인 동족들과 함께 활활타는 아궁이에 무더기로 던져진 화장장에서 시커먼 연기가 돼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장면을 눈으로 목격한 기록들과 아우슈비츠를 거쳐 부켄발트의 수용소에 이르는 동안의 생지옥의 체험, 병든 아버지가 갈증에 못이겨 물을 좀 달라는 것을 사정없이 곤봉 세례로 막아 버리는 독일군 장교의 행패를 지켜보면서도, 오직 신음소리 외에는 꼼짝조차 할 수 없었던 어린 소년의 심정을 참으로 현장감 있고 안타깝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체험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결코 수용소에서의 첫날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인생을 하나의 길고 긴 밤으로 바꾸어 일곱 번 저주받고 일곱 번 봉인되게 한 그날 밤을…. 나는 결코 그 연기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그 고요하고 푸른 하늘 아래 똘똘 감긴 연기의 소용돌이로 변해버린 어린이들의 작은 얼굴과 몸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나의 신앙을 영원히 소멸시켜버린 그 불길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나에게서 살고 싶은 욕망을 영원히 앗아가 버린 그날 밤의 침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결코 나의 하나님과 나의 영혼을 살해하고 나의 꿈을 먼지로 만들어 버린 그 순간들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설령 내가 저주를 받아 하나님보다 더 오래 살게 된다 할지라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절대로….”

엘리 위젤이 그의 체험적 소설 ‘밤’을 통해 모든 인류의 가슴에 새기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히틀러라는 한 광기 어린 인물과 이미 도덕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폭력정권의 권위주의 사슬에 맹목적으로 순종했던 독일 민족이 저질렀던 끔찍한 인간살육에 대한 고발뿐만 아니라, 바로 ‘인간의 죄된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 악마적 파괴력을 지녔는가를 생생하게 고발코자 한 것일 터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홀로코스트’라는 대학살은 죄 없는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카인의 후예, 우리 인간의 참혹한 살인 본성이 저지른 끔찍한 사건이라는 고발일 것이다. 어느 역사학자의 말처럼 그 당시에는 박해하는 20억의 히틀러와 고난 받는 유대 공동체가 있었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한 것일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1935년 이후 오늘까지, 히틀러 이후 오늘까지, 인간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버려 둔 채,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며 서로를 죽이고 증오하며 투쟁하고 빼앗는 역사의 반복을 계속하며 우리 삶의 소중한 공간들이 에스겔 골짜기의 생명 없는 ‘마른 뼈들’이 되어 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며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삶의 공간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현실을 극복해 갈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그 비결을 간단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롬 12:2)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말은 자기 연민과 공포의 눈물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에 대한 발견의 눈물이며, 폭력과 갈등과 증오와 욕망을 넘어서는 화평과 겸손의 눈물이다.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자기 헌신과 봉사의 결단이며, 타인의 삶이나 하나님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죄된 자아를 고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의 변화를 결단할 때, ‘가능한 일’로 변화된다는 말이다. 니버란 신학자는 이것을 일컬어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라 말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단 한번뿐인 우리들의 소중한 삶과 미래가 ‘불가능한 가능성’의 실현으로 이웃과 세계를 향하여 내어 주는 삶, 봉사하는 삶, 열매 맺는 삶이되길 함께 노력하자.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