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윤태일] 性에서 자유로운 화장실

입력 2012-02-13 18:04


“중요한 것은 작은 시설 하나에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태도가 배어있는가이다”

네덜란드의 문화인류학자 호프스테드에 의하면 문화는 양파와 같다. 문화는 양파처럼 여러 겹으로 쌓여 있으며 한 사회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나 상징, 제의, 영웅, 음식 등을 통해 표출된다. 그렇다면 문화는 화장실을 통해서도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시대와 지역마다 나름의 화장실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제주도의 흑돼지 뒷간이나 강원도의 잿간, 절의 해우소(解憂所) 등은 자연과 공생했던 우리 문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외국여행을 하다 보면 나라마다 화장실 문화가 다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중국의 문짝 없는 공중화장실이 당혹스럽지만, 유럽의 공중화장실이 대부분 유료라는 사실에도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상수시설 못지않게 환경에 부담을 주는 것은 하수시설이다. 거리에서 물을 사 먹는 것에 익숙한 것처럼 자신의 배설에 대한 환경비용은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지난 일주일간의 미국 캘리포니아 서부지역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역시 화장실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지역 뉴포트 해변의 공중화장실에는 문이 없다. 날씨가 따뜻한 지역이다 보니 공중화장실에 집 없는 걸인들도 많이 꼬여 들고, 마약과 성폭행 등 범죄의 온상이 되기 쉽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산타모니카 등 캘리포니아 해변 지역에는 의외로 문 없는 공중화장실이 많다고 한다.

더 인상적인 것은 버클리대의 화장실이었다. 그 대학의 기숙사 화장실은 성중립적 화장실(GNB: Gender Neutral Bathroom)이라고 되어 있었다. 남녀 학생들이 같은 층에서 생활하는 버클리 대학에서는 화장실 겸 세면실도 남녀공용이다. 남자용 소변기는 따로 없고 용변을 보거나 샤워를 하는 별도의 공간만 있다(물론 공간마다 문은 다 있다). 아침에 샤워하고 대충 걸치고 나오는 남녀 학생들이 서로 민망할 것 같기도 한데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버클리대뿐 아니라 미국 서부지역의 다른 대학에도 이런 성중립적 화장실이 꽤 있다고 한다. 그래서 확인해 보니 위키피디아에 이런 화장실에 대한 별도의 항목이 있을 정도였다. 성중립적 화장실은 성에서 자유로운 화장실(gender free toilet), 혹은 남녀공용 화장실(unisex restroom) 등으로 불린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생물학적 성에 기초하지 않는 성적 소수자들로부터 이런 화장실에 대한 요구가 나타났다. 또 반대 성의 어린아이나 노인, 그리고 장애인을 보살펴야 할 때 남녀가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이런 화장실이 필요하다. 따라서 성적 소수자를 위한 화장실일 뿐 아니라, 아이들이나 노인, 장애인을 돌봐야 하는 가족용 화장실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최근 이런 성중립적 화장실이 꽤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캐나다에서는 2008년부터 서(西)온타리오대, 빅토리아대 등에서 이런 화장실을 만들었고, 영국에서도 역시 2008년 브래드포드대를 시작으로 맨체스터대, 에딘버러대, 애버딘대, 글래스고대에서 차례로 도입했다. 미국에서도 여러 대학에서 이런 화장실을 도입했고, 2011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고등학생이 학교 내에 이런 화장실을 설치해 달라고 교장에게 청원했다. 아시아에서는 태국이 의외로 빨라서 2003년부터 대학과 고등학교에 도입해 이런 화장실을 분홍 연꽃(Pink Lotus)이라고 부른다.

성중립적 화장실이라는 이름은 낯설지만 그 자체는 별로 새로운 것 없는 남녀공용 화장실이다. 그런 화장실이 과연 성적 소수자, 장애인과 어린아이들 및 거동이 불편한 노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은 시설 하나로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려는 태도다.

흔히 화장실이 그 문화의 수준을 대변한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히 화장실이 얼마나 청결하고 현대적인가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생리현상에서 누구도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얼마나 배려하느냐, 그것이 바로 화장실이 문화의 수준을 대변한다는 참 뜻이다.

윤태일 한림대 교수 언론정보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