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기수] 의료분쟁 ‘조장법’?
입력 2012-02-13 18:04
‘뜨거운 감자’는 취급 곤란한 문제, 또는 다루기 어려운 사안을 가리킬 때 포괄적으로 쓰는 표현이다. 보건의료계에도 이렇게 먹을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가 적지 않다.
그중 최근 들어 가장 논란이 많은 게 박카스(동아제약), 활명수(동화약품) 등 24개 대중약품의 슈퍼 판매 허용을 위한 약사법 개정안과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조정 등에 관한 법률(의료분쟁조정법)에 관한 문제다. 특히 오는 4월 시행 예정인 의료분쟁조정법에 대한 산부인과 의사들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
의료분쟁조정법은 10년 이상 지루한 공방전을 치른 끝에 ‘형사처벌 특례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가장 큰 고비를 넘어 지난해 4월 가까스로 입법화됐다. 이때만 해도 의사들은 숙원사업이 해결됐다며 환영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보건복지부가 같은 해 11월 하위 법령인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입법 예고하면서 싸늘하게 반전됐다. 보건복지부가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불가항력적 분만사고의 경우 산부인과 의사들의 50% 보상 책임을 명시한 게 불씨였다.
즉각 산부인과 의사들은 잘못이 있는 경우에만 책임을 진다는 우리나라 민·형법상의 ‘과실책임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철회해줄 것을 요구했다. 대한의사협회와 소아청소년과 의사 중심의 대한신생아학회도 산부인과 의사들의 이 같은 입장에 동조, 반대성명을 냈다.
이후 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시행 이후 1년의 유예기간을 둔 만큼 그 안에 손질하면 된다며 산부인과 의사들의 반발을 두 달 이상 방치하고 있다. 결국 대한분만병원협회는 보건복지부가 무과실보상 50% 부담 조항을 끝까지 철회하지 않는다면 오는 26일 대한산부인과학회 개원특임위원회와 공동으로 중앙대병원 4층 동교홀에서 아예 의료분쟁조정법 거부 선포식을 갖겠다고 예고했다.
과거 의료분쟁조정법 제정의 가장 큰 걸림돌은 중대 실수에 의한 사고 외엔 교통사고특례법과 같이 형사상 면책권을 의사들에게 주는 게 법 형평성에 맞는가 하는 문제였다. 새로 제정된 의료분쟁조정법은 우여곡절 끝에 이 걸림돌을 제거했다. 따라서 의사들은 앞으로 과실이 인정되는 사고의 경우에도 민사상 배상 책임만 지게 될 뿐 형사처벌은 받지 않게 됐다.
그런데 왜 또 반발하는 것일까. 무과실 사고를 어떻게 수용할지에 대한 정부와 의사들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의사 쪽의 잘못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 말이다. 의료사고, 특히 산부인과 분야의 분만사고는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컨대 뇌성마비 등 기형 출산 및 사산은 태내 감염에 의한 경우가 90% 이상이며, 이를 산전에 확인하기란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의사 무과실로 드러난 사고의 경우 국가가 100% 보상하는 방안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미권의 배상보험 형식으로 분만비에 사고위험부담금을 얹어 피해구제기금을 조성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일 처리는 심사 조정 기구를 통해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산부인과는 그러지 않아도 고령산모의 증가로 분만사고 위험이 더욱 높아지고, 가임기 부부의 임신 및 출산 기피 현상에 따른 경영난으로 전공의 지원자가 해마다 줄어들어 전멸 위기 상황이다. 게다가 분만 환자(?)가 의료사고를 주장하며 보상을 요구할 경우 특별한 과실이 없는데도 절반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 누가 임신부를 진료하려 할 것이며, 누가 산부인과 전공의가 되길 바라겠는가.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