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갤리선의 노예에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로 존 녹스 (上)
입력 2012-02-13 18:22
온갖 고문·협박에도 ‘성모 마리아 초상에 입 맞추라’는 개종요구 거부
“성모 마리아 초상에 입을 맞추어라.”
구교도인 프랑스인들은 갤리선의 노예로 잡혀온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그들은 개종의 표시로 성모 마리아에 입을 맞추라고 명령했다. 거부하면 모진 고문과 채찍을 가할 것이라는 협박도 곁들였다.
프랑스인들은 완강하게 거부하는 한 스코틀랜드인을 끌고 가 억지로 그림에다 입을 맞추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 스코틀랜드인은 순식간에 그림을 낚아채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이제 성모 마리아가 그녀 자신을 구원하도록 하라. 그녀는 충분히 가볍지 않은가. 이제 수영도 배워야지.”
이 일이 있은 후, 프랑스인들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더 이상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온갖 고문과 채찍의 협박에도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이 노예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녹스(John Knox)로 여겨진다. 그는 프랑스의 갤리선 ‘노트르담’에 끌려가 19개월 동안 족쇄에 묶인 노예로 지냈다.
갤리선의 노예 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고 끔찍하다. 갤리선의 노예 생활이 어떤지는 영화 벤허를 떠올리면 된다. 영화 벤허에는 벤허가 배 밑창에서 족쇄에 묶인 채 둥둥 두드리는 북소리에 따라 고통스럽게 노를 젓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마 존 녹스도 벤허 신세와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갤리선의 노예는 배 밑창에서 족쇄에 묶여 꼼짝도 못한 채 노만 저어야 했다. 힘이 들어 노를 제대로 젓지 못하면 곧바로 채찍이 날아왔다. 갤리선의 노예는 노예 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다. 이런 끔찍한 지옥 같은 생활을 하는 노예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갤리선에서는 협박과 회유 등 갖은 수단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모두 헛수고에 그치고 말았다.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은 존 녹스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존 녹스와 그 일행들은 비참한 갤리선의 노예로 전락한 것인가? 존 녹스와 그 일행은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패해 노예가 되었다. 원래 그들은 스코틀랜드에 종교개혁의 복음을 전했던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의 화형에 분노해 시위를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위샤트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 하인리히 불링거의 영향을 받아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끈 사람이었다. 그는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전역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로마 가톨릭교회 당국의 교권 남용에 대해 비판했다.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은 그런 그를 붙잡아 1546년 3월 1일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화형에 처했다.
그의 처형은 시민들의 봉기로 이어졌다. 봉기는 평민뿐만 아니라 추기경의 학정과 전횡에 실망한 귀족들에게까지도 확산되었다. 1546년 5월에 시민들은 추기경의 관저를 습격해 추기경을 살해했다. 시위대는 왕실의 공격에 대비해 세인트 앤드류스 성을 점령해 수비대를 조직했다. 존 녹스는 이 시위대의 주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 시절 위샤트를 만나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였다. 위샤트의 열렬한 지지자로 그가 설교할 때면 검을 들고 호위했다.
스코틀랜드 왕실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당시 우호적 관계였던 프랑스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프랑스는 1547년 7월 29일 21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보내 세인트 앤드류스를 점령했다. 수비대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녹스와 그 일행은 프랑스로 끌려갔다. 귀족들은 루앙의 감옥에 감금되었지만 녹스와 그 일행은 가장 비참한 갤리선의 노예가 되었다.
녹스는 갤리선의 노예로 있으면서도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548년 여름에 프랑스 함대는 영국 배들을 정탐하러 스코틀랜드로 왔다. 그때 그는 열악한 노예 생활로 병이 들어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러나 그의 눈에 스코틀랜드의 교회들이 보이자, 그는 자신이 그곳에서 다시 설교할 때까지는 죽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일행에게도 석방의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녹스의 간곡한 희망은 이루어졌다. 1549년 초반 녹스 일행은 종교개혁적 마인드를 지닌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석방된다. 영국에 도착한 그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영국 추밀원은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와 월리엄 세실의 동의를 얻어 그를 스코틀랜드와 가까운 버위크의 설교자로 임명하였다. 녹스는 버위크에서 공동기도서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천주교의 예배를 영어로 옮긴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개신교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신도들을 성찬상에 둘러앉게 하였고 상을 향해 무릎을 꿇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의 종교개혁적 설교는 교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에드워드 6세에 의해 영국 4대 주교 가운데 하나인 로체스터 주교에 임명되었으나, 그것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여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그의 사역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가톨릭교도 ‘피의 메리’가 영국 여왕으로 등극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영국을 떠나야 했다. 영국을 떠나 우선 칼뱅이 있는 제네바로 향했다. 그때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처형한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제네바로 간 그는 칼뱅을 만나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해 신학적 자문을 구했다. 그는 미성년자가 신권이라는 이름으로 통치를 해도 되는지, 그리고 여성이 통치하고 주권을 그 남편에게 넘겨도 되는 것인지, 백성은 신을 믿지 않고 우상숭배적 통치자에 순종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 물음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스코틀랜드 왕이 된 메리 스튜어트와 영국 여왕 메리 튜더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칼뱅은 정치적 상황에 대해 조심스러운 답변을 해주었다. 제네바에서 머무는 동안, 녹스는 1555년에 스코틀랜드에 잠시 귀국할 기회가 있었다. 스코틀랜드 섭정 기즈 메리가 종교개혁자들을 박해하는 ‘피의 메리’ 여왕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녹스와 종교개혁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녹스는 스코틀랜드에 귀국해 6개월간 전국을 돌며 가톨릭교회의 제도와 오류를 지적하고 종교개혁적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국민적 지도자가 되었고 메리 스튜어트 여왕의 이복형제인 제임스 스튜어트 경을 비롯하여 많은 귀족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교회 당국은 여전히 반종교개혁적이었다. 그가 1556년에 제네바에 다시 돌아가자 교회 당국은 그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사르고 이단으로 정죄했다.
섭정 기즈 메리는 프랑스 출신으로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통치했다. 1558년 그녀가 딸인 메리 스튜어트 여왕을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와 결혼시키려 하자 많은 귀족과 정치지도자들과 종교개혁가들이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의 지배를 반대했다. 녹스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지는 폭정과 종교 탄압에 맞서 유명한 글 ‘괴물 같은 여성 통치에 대한 첫 번째 나팔소리’를 저술했다. 그는 이 글에서 영국의 ‘피의 메리’와 스코틀랜드의 섭정 기즈 메리와 같은 여성 통치를 ‘괴물’ 같은 것으로 지칭했다. 여성의 지배가 자연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주장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욕먹을 만한 일이겠지만, 그의 진의는 다른 데 있었다. 여자든 남자든 왕의 폭정과 종교탄압을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가에서 태어난 것만으로 왕이 될 수 없고, 왕도 선거에 의해 뽑아야 하며, 왕이 우상숭배를 하며 폭정을 행할 경우, 왕의 지위를 박탈할 수 있고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588년에 기즈 메리와 귀족들 및 백성들에게 종교개혁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는 서신에서 기즈 메리에게 종교개혁에 앞장설 것을 권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정부의 권세에 복종해야 하지만 통치자가 불법을 행한다면 무장반란도 가능하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