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일그러진 자화상을 회복하라

입력 2012-02-13 18:23


안면마비의 고통을 아는가. 더구나 목사가 안면마비를 당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안면마비가 찾아온 처음 며칠 동안은 너무 황당해서 잠을 못 이루었다.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일체 면회를 거절했다. 마치 혼자 새장에 갇혀 있는 새처럼 교회 서재 방에서 고독한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물론 밤이 되면 불면의 고통에 시달렸다. 그렇게 긴긴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드디어 아침이 되면 가장 먼저 거울을 보며 일그러진 얼굴이 얼마나 회복되었는가를 살폈다. 그러나 며칠 동안은 차도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흉측하게 일그러져갔다. 나는 절망하며 뒤돌아서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간조차 알 수 없는 깊고 적막한 밤, 거울 앞에 비친 일그러진 내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감동이 왔다. “아, 이게 나의 영혼의 모습은 아닌가. 내 나름대로는 주님을 위해, 교회와 교계를 위해 열심히 뛴다고 하였지만 조금이라도 나의 탑을 쌓고 높이기 위한 교만은 없었던가. 주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모습은 없었는가.” 그런 마음이 들자 주님 앞에 한없이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주의 일을 하다가 너무 과로하고 피곤해서 안면마비가 온 것이지만 주님 앞에는 더 두려워졌고 정직해졌다.

그러면서 내 영혼을 넘어서 문득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모습이 가슴 아프게 보이는 듯 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방송, 신문, 인터넷에 얼마나 흉측한 얼굴로 비춰지며 온갖 조롱과 빈정거림을 당하고 있는가. 그런데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여전히 법정고소와 고발, 불미스러운 사건과 세력 다툼이 이어지고 있다. 이 얼마나 참혹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이제 일그러진 자화상을 떨쳐버리고 원래의 자화상을 회복해야 한다. 나는 안면마비가 왔을 때 처음에는 너무나 황당하고 속상했지만 다시 주님 앞에 엎드려 내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았다. 수줍은 영혼의 설렘과 떨림, 순백의 사랑으로 첫 설교를 하던 초심을 생각했다. 그리고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와 초기 응급조치를 잘해서 빠르게 회복하여 목회 활동을 잘하고 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다. 초대 한국교회는 그저 주님 사랑에 감격해서 무조건 아멘이요, 사명이요, 일사각오의 충성이 아니었는가. 무슨 기득권이 있고 교권이 있고 고소와 고발이 있었는가. 그저 차디찬 교회 마룻바닥에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하면 모든 것이 내 탓이요, 내 허물이며, 주님의 은혜요, 사랑뿐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부끄러움과 수치도 모른 채 언론에 교회와 교계의 싸움과 분열을 공개하고 때로는 내부 비리를 폭로하기도 한다.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 첫 소명의 감격을 회복하자. 안면마비는 잘못하면 몇 년, 아니 평생 가는 경우도 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자. 이제라도 응급조치를 해서 회복할 수 있을 때, 그때 돌아가자. 그 차가운 새벽의 시린 눈동자로, 가슴을 치는 뜨거운 통회의 눈물을 쏟으며.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