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고혜련] 한 겨울밤의 꿈

입력 2012-02-12 18:20


한바탕 백일몽에서 깨어난 듯 허전했다. 연극배우의 꿈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며칠 전 명동예술극장(옛 명동국립극장)이 아마추어 배우를 선발하는 오디션에 지원했다 미역국을 먹은 거다.

‘그래 이거야.’ 모집 광고를 접하는 순간 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나는 밤마다 불빛 찬란한 명동 한복판에서 행해질 연극 연습에 빠질 내 모습을 상상하곤 ‘야호, 딱이다. 딱.’하고 지레 즐거워했다. 그러나 10대 1의 경쟁이 내 꿈을 조각냈다.

극장 측은 직장인 아마추어들을 두 달간 훈련시켜 4월 중 이 극장무대에 올린다고 했다. 내가 무리를 해가며 응시한 첫 번째 이유는 그 광고가 내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일상에서 가슴 뛰는 일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드문 일인가. 가슴이 설렌다는 것, 그 일에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다는 얘기와 상통하는 거다.

둘째로는 공연예정 작품의 출연진 구성상 내 나이와 용모로도 참여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셋째 이유는 대학 연극반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당시도 경쟁 높은 오디션을 통해 어렵게 무대에 섰다. 수업이 끝난 저녁시간, 연출자(오현주 선생님)의 지도 아래 많은 선후배와 동고동락했던 추억들이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또 있다. 연극을 좋아하는 각 분야 사람들과 어울려 호흡을 맞춰가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예술이며 기쁨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기회는 내게 다른 세상을 만나러 가는 문(門)이기도 할 테니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일 좋아하는 공연 장르가 연극이기 때문이다. 직업의 성격상, 취미상 수많은 공연을 보아오면서 내린 결론은 연극이 가장 훌륭한 장르라는 것. 공연의 주 고객인 여성들은 뮤지컬이나 오페라의 화려함에 매료된다. 하지만 나는 연극이 무엇보다 깊은 사유와 반추의 시간을 갖게 한다는 데 큰 매력을 느끼고 있다. 더구나 알찬 내용에 미안할 정도로 저렴한 입장료가 황송하고 좁은 공간에서 뿜어내는 열기는 관객을 뜨겁게 하니까.

또 많은 사람들의 땀과 열정이 만들어낸 연극을 일부 젊은이들만 관람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접근성도 훌륭하고 전통과 추억, 상징성을 지닌 명동예술극장의 다양한 실험이 연극 부활에 기여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사회 각 분야에 한때를 풍미하는 트렌드가 있다. 올해, 연극이 대세인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연극종사자들이 돈 걱정 않고 맘껏 공연에만 몰입해 좋은 연기자와 작품이 마구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연극의 진정한 맛을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가 과연 연극에 심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떨어지자 내심 붙을까 걱정했던 남편이 “여보, 괜찮아?”라고 물으면서 웃음을 참는다. “그 사람들 실수한거야. 날 안 뽑은 거.” 연극 활성화 전략 몇 가지를 전해주리라 마음먹었었는데…. 착각은 자유다.

고혜련 제이커뮤니케이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