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49) 이용도와 신비주의

입력 2012-02-12 17:43


하나님과 直交 추구한 토착적 신비주의자

1930년대 한국교회 신학의 변화와 관련해 신비주의의 대두를 말했는데, 한국에서 토착적인 신비주의 사상을 보여준 인물이 감리교의 이용도(李龍道·1901∼1933) 목사였다. 흔히 ‘고난 받으시는 그리스도 신비주의자’로 불리는 그의 신비주의는 서구교회 전통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토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사변적 신학논리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전통의 거룩한 독서(聖讀) 유산은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경험(관상·contemplatio)의 흔적이 있을 뿐이다. 1930년대 상황에서 그가 서구교회의 신비주의적 전통을 이해하거나 이를 수용했다고 볼 수 없다.

그의 신학적 뿌리는 스스로 체달한 체험적인 신비주의였다. 그러나 그의 신비주의는 하나님과의 직교(直交)와 합일(合一)이라는 점에서는 서구적 전통의 신비주의와 유사한 일면이 있다. 이것은 그가 서구교회적 유산을 수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비주의라는 개념이 공통의 기반 위에서 지칭되기 때문이다.

이용도는 1901년 4월6일 황해도 김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출생했다.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된 이래 신학교 졸업 때까지 네 차례에 걸쳐 3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9년 만에 송도고보를 졸업한 그는 24세의 나이로 1924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수학 중이던 1926년 11월에는 폐결핵 3기라는 선고를 받고 평안남도 강동(江東)에서 요양하게 되지만 이런 육신의 질고는 그의 삶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체험적인 신비주의, 고난의 그리스도상(像)은 이곳에서 태동했을 것이다. 민경배 교수는 이 체험을 ‘강동체험’이라고 불렀다.

그가 신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이호빈, 이한신을 만나는데 ‘삼이(三李) 형제’로 불릴 만큼 우의를 나누게 된다. 1928년 1월 신학교를 14회로 졸업한 이용도는 강원도 통천의 시골 교회 목회자로 파송되었으나 회심의 경험이 없는 첫 목회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24일 신비적 체험을 했고, 1929년 1월 4일 강원도 양양교회 집회에서 이 체험을 거듭 경험했다. 이 체험이 이후 그의 부흥회 인도의 원동력이 되었다. 1929년 1월부터 그가 사망한 1933년 10월까지 5년간 부흥회 강사로 활동하게 된다. 그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부흥회를 인도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 2월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의 활동을 두고 그를 한국의 신비주의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교회를 침체되었으며 개혁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했다. 그는 자신이 ‘광야의 소리’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예수 선지자나 기독교의 주문도리(取集者)만 되지 않게 하옵소서. 미친 듯이 부르짖는 광야의 소리가 되게 하시고 새 술에 취한 듯이 덤비는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소서.” 1930년 1월 2일자의 일기는 그의 행로를 예시해 주는 듯 하다. 형식에 매이지 않는 예배, 열광주의적 성격, 절대적 사랑의 메시지는 그의 사역의 특징이 되었다.

그를 신비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신비주의자’로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 그의 행로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 일예가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킨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키운 바 되는 이 합일의 원리여. 오 나의 눈아, 주를 바라보라. 일심으로 주만 보라. 잠시라도 딴눈 팔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보라. 나의 시선에 잡힌 바 주님은 안의 속에 안주하시라”는 표현이다. 또 이렇게 말한다. “사랑으로 주와 하나이 되었을 때 나의 행하는 것, 주의 행하는 것이 되고, 나는 주님 속에 주님은 내 속에 계셔 신앙의 완성이 오고, 그 때가 바로 완성의 때라.” 중세신비주의자들과 너무도 일치하는 그의 기록이 놀랍기만 하다. 스콜라주의로 굳어진 냉랭한 사제주의 체계에 만족하지 못했던 중세 신비주의자들은 그런 외형의 조직을 벗어나 신과의 직교와 합일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용도는 당시의 형식주의와 교권, 제도를 일탈하는 하나님과의 직교와 연합을 갈망했던 것이다. 그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자 교회 개혁의 길이기도 했다.



그가 말한 개혁의 도구는 회개와 기도, 사랑이었다. 1927년 5월2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 우리 교회에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일이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진흥치 못하는 한 큰 원인인 것입니다.” 그가 회개와 기도를 강조한 것은 흠잡을 일이 없다. 그는 사도 요한을 이상으로 삼고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가장 중요한 본문으로 설교했다. 그는 신앙시대를 4시기로 구분했다. 제1단계 교회시대는 교회의 의식, 제도, 교리가 중시되는 시기를 말하고, 제2단계 수도시대는 자의적 노력으로 죄를 버리고 금욕으로 도를 이루어보려는 시기다. 제3단계는 자기 노력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득의 시대로 바울이 그 대표다. 마지막이 사랑의 단계인데, 신앙만으로는 부족하고 사랑의 화신이 되어야한다. 그는 사랑을 인간 최고의 목표이자 신앙의 최고 단계로 보아 차별 없는 사랑을 강조하고 실천하고자 했다. 사랑을 절대적 가치로 이해하는 것은 신비주의자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그가 말한 네 가지 단계도 결국 차별 없는 사랑을 최고의 덕으로 강조하는 것인데, 이런 정신에서 볼 때 중세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1091∼1151)가 말하는 ‘4가지 사랑’에 비견될 수 있다.



변종호의 지적처럼 이용도는 1932년 신령파 집단인 한준명 집단을 비롯해 입신, 방언, 예언을 중시하는 그 아류들과 접촉하기 전까지는 흠잡을 데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리교 경성지방회의 의심을 받았고, 장로교의 평양노회, 황해노회, 평서노회 등의 금족령을 받고 1933년 9월 장로교 제22회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최근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