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란 일종의 배설물… 김태용 소설집 ‘포주 이야기’
입력 2012-02-10 18:25
“나는 포주였다. 다음 문장은 떠오르지 않는다. 벌써 몇 달째 이러고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포주 이야기’ 속 1인칭 화자는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유서를 쓰고자 하지만 글을 진척시키지 못한 채 ‘나는 포주였다’라는 문장만 되풀이한다. 왜 쓰지 못하는가. 이는 소설가 김태용(38·사진)의 글쓰기 전략과 관련된다.
글을 쓰는 작가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전직 포주를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작가의 형상과 포주의 형상을 충돌시키자는 것이 그의 전략인 것이다. 언어를 연상시키는 작가와 몸을 연상시키는 포주의 대비는 이질적 세계의 이원성과 맞물린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포주였다, 라고 쓸 수 없었다. 아니 일흔이 넘어서야 글을 배웠다. 지금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지만 글을 배운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다. 평생 글을 멀리하고 더러운 몸뚱이를 굴리며 육체의 삶을 살았던 나는 한순간 글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버렸다.”(13쪽)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들엔 ‘포주 이야기’의 화자처럼 죽음을 눈앞에 둔, 혹은 각성 상태인지 환각 상태인지 모를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정된 공간인 침상 위나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말을 이어간다. 결국 말이란, 이야기란 일종의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게 작가의 생각인데 단편 ‘물의 무덤’은 아예 배설물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욕실 변기 대신 요강을 사용하고 있었다. 변기에 일을 보고 내리지 않는 것보단 차라리 요강이 나은지도 몰랐다. 요강에 든 것을 변기 안에 버리고 바지를 내렸다. 아랫배에 힘을 주며 그는 어머니의 배설물과 자신의 배설물이 섞이는 이상한 쾌감을 느꼈다.”(37∼38쪽)
김태용의 글쓰기는 배설의 미학인 것이지만 여기서 배설은 이질적인 부분이 자아에서 분리되는 과정이 아니라 자아 자체의 붕괴 과정으로 나타난다. 단편 ‘뒤에’에 담긴 내용은 이런 생각에 대한 작가 자신의 고백처럼 들린다. “도시가 붕괴되었고 당신도 붕괴되었다. 붕괴 뒤에 붕괴가 있었다. 나 역시 도시와 함께 붕괴되었다. 붕괴 이후 나는 폐허의 목소리로 남아 이야기 뒤에 이야기를 부르고 있다. (중략) 이야기 뒤에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나는 다시 시작하고 있다. 도시 뒤에 도시가 있다. 도사리고 있다. 그것이 내가 이야기를 이어가는 이유다.”(237쪽)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