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7) 분노와 폭력의 유전자
입력 2012-02-09 21:22
유대 대표 “황제 신상 세우려면 우리를 다 죽이시요” 결사항쟁 통보
티베리우스의 종손 카이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 3년이 되는 AD 40년에는 로마와 모든 속주들이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을 유피테르 신의 동생으로 자처하여 자기 딸을 유피테르 신상의 무릎에 올려놓았고, 신들의 관습을 따라 누이와 근친상간을 했다. 그는 모든 신상의 머리를 잘라내고 자신의 두상을 얹었으며 심지어는 여신의 목도 잘라내고 자신의 두상을 얹게 했다. 그는 또 모든 속주의 신상들을 로마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헬라의 올림포스 신전에서 전국 경기의 주최자인 제우스 신상을 옮길 수 없다고 거부했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올림포스에 간 멤미우스 레굴루스가 황제의 명령을 수행치 못하여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유대고대사 19-1)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유대 쪽이었다. 이미 안티오쿠스 Ⅳ세 때에도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다가 유다 마키비의 반란을 초래한 적이 있고, 헤롯도 자신이 건축한 성전의 문에 독수리 상을 세웠다가 폭동이 일어난 사례가 있는데 그 성전에 황제의 신상을 세운다는 것은 유대 민중의 봉기를 재촉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수리아 총독은 유대를 공격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일단 로마군 2개 군단을 유대로 진입시켰으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총독을 방문한 유대인 대표들은 이미 그들의 결사 항쟁 의지를 통보했다.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율법이 금하는 일을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을 다 죽이지 않으면 신상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유대고대사 18-8)
페트로니우스 총독은 유대인 대표들에게 통사정을 했다.
“나는 황제의 신하이고, 황제의 명령에 복종할 수 밖에 없소.”
그러나 유대인들은 완강했다.
“총독께서 황제의 명령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도 율법의 명령에 복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황제 폐하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인가?”
유대인 대표들은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각하, 율법을 훼파하기 전에 우리를 모두 죽이십시오.”
수리아 총독과 유대인 대표의 그런 실랑이는 40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황제의 공격 재촉이 잇따르자 난감해진 페트로니우스 총독은 일단 병력을 이동시키는 척 하면서 유대인들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유대에서 폭동이 시작되면 로마의 모든 속주에서도 잇달아 유대인 폭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것이었다.
“유대인들을 학살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따르다가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다.”(유대고대사 18-8)
아우를 죽인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폭력의 유전자는 로마인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 쪽에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늦게 얻은 아들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태중에서는 쌍둥이 아들들이 서로 싸웠던 것이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창 25:22)
그들 중의 아우 야곱은 무서운 형 에서를 피해 북쪽의 밧단아람으로 도망하여 큰 재산을 모은 후 돌아왔으나 언제 형에게 죽임을 당할지 몰라 늘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그가 자녀들과 함께 세겜성 근처에 기거하고 있을 때 문제가 생겼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성에 들어갔다가 그 성의 추장 세겜에게 끌려가 강간을 당한 것이다. 세겜이 디나와 결혼하기를 원하므로 그 부친 하몰이 청혼하기 위해 야곱의 장막을 방문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 문제를 거론하며 세겜은 물론 그 성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아야만 디나와 혼인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것을 좋게 여긴 세겜과 그 성의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았다.
“제3일에 그들이 아직 아파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몰래 그 성읍을 기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창 34:25∼27)
늘 자신의 형 때문에 폭력을 혐오했던 야곱은 그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저질렀던 몹쓸 일을 죽는 날까지 마음에 담아 두었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 열두 아들과 그 후손들에 대하여 축복할 때에 그는 시므온과 레위를 축복하지 않았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창 49:5)
그는 오히려 아들들에게 경고의 말을 남겼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6∼7)
그러나 후일 레위의 자손 중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는 모세가 태어났고, 또 그의 형 아론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받으면서 레위 지파는 제사장의 지파가 되었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최악의 저주를 모면했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로다”(신 33:10)
그러나 레위 지파가 완전히 야곱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레위 지파는 계속해서 수난을 당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수하의 제사장들은 다윗을 도와 주었다가 사울 왕에게 몰살을 당했고,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질 때 여로보암을 추종한 열 지파와 함께 했던 수만 명의 레위인들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명령으로 학살을 당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 BC 167년 안티오쿠스 Ⅳ세의 박해 때 율법서를 지니고 있거나, 그것을 지키거나, 아이에게 할례를 베푼 레위인은 모두 처형을 당했다. 유다 마카비의 반란이 성공하여 레위 지파의 왕조인 하스몬 왕국이 수립되었으나 결국 이두매 즉 에서의 후손인 에돔 출신 헤롯에게 찬탈 당해 멸망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북의 이스라엘과 남의 유다가 멸망한 후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으로 시작해서 계속 이방 민족의 지배를 받아 왔다. 바벨론 다음에는 페르시아가 그들을 지배했고, 그 다음에는 헬라가 다스렸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유대는 애굽의 프톨레마이오스에 속했다가 다시 셀류코스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잠시 레위 지파가 세운 하스몬 왕조가 계속되다가 헤롯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요 4:18)
헤롯 가문의 왕들은 모두 로마 제국의 임명을 받았으므로 실제로는 로마의 속주였다. 그러므로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한 BC 586년부터 계산하면 626년이고, 헤롯에게 찬탈 당한 하스몬 왕조의 127년을 빼면 500년간 이방인의 지배를 받아온 셈이었다. 그러는 동안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유대인들의 의사 표시 방법은 오로지 시위와 폭동 밖에 없었던 것이다. 40일 간이나 공격을 결행하지 못하고 있던 페트로니우스 총독은 다시 황제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유대인들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그 기세로 보아 폭동의 규모가 로마에 대한 전쟁과 같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카이우스는 로마 안에서도 폭정으로 비난을 사고 있었다. 그는 종들이 그 주인을 고발하는 제도를 만들어, 종이 고발하는 주인은 그 신분을 가리지 않고 처형한 후 재산을 몰수했다.
“황제의 숙부 클라우디우스의 종 폴룩스가 그 주인을 고발했다. 황제는 숙부를 재판하는 과정을 지켜보았으나 그를 처형하지는 못했다.”(유대고대사 19-1)
로마 안에서 곤란한 처지가 되어 있을 때 아직도 유대를 공격하지 않는 수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의 보고서를 받고 그는 격노하여 명령서를 보냈다.
“그대는 황제의 명령보다 유대인의 뇌물을 더 중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나의 명령을 어기고 유대인의 비위만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그대는 내 의도가 무엇인가를 깨달아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여 황제의 명을 어기는 자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본을 보이도록 하라.” 그것은 곧 자살 명령이었던 것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