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윤복희 (6)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배고픔과 무대였습니다
입력 2012-02-07 18:05
“별을 보고 울었어요/ 달을 보고 울었어요/ 어디 갔나 내 어머니 불러도 대답이 없네/ 비가 오고 눈이 오면 엄마 품이 그리워요/ 어디 갔나 내 어머니 불쌍한 내 어머니”
손목인 선생이 작사 작곡한 곡 ‘보고 싶은 엄마’의 노랫말입니다. 나는 구두닦이 통을 메고 얼굴에 구두약을 바르고 염색한 헐렁한 군복을 입고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천재소녀 윤복희’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겁니다. 내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객석에서는 금세 흐느끼는 소리가 들립니다. “엄마 엄마” 하면서 엄마를 찾으면 무대 밑에서는 바이올린이 처량하게 울립니다. 그러면 공연장 안은 눈물바다를 이루게 됩니다. 나는 그 노래만 부르면 슬펐습니다.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엄마는 내 마음속에서 다시 죽었습니다. 엄마가 슬프게 돌아가셔야 내 노래가 더욱 슬퍼집니다.
내가 이 노래를 부르고 나서부터 서서히 일반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레코드 회사에서 음반으로 취입하자고 했습니다. 생전 처음 하는 녹음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악전고투 끝에 녹음을 마친 뒤 손목인 선생이 “복희야, 그냥 무대에서 노래하고 연극만 하자”고 했습니다. 음반으로 낼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음반이 나왔다면 나는 한국 최초의 어린이 가수로 기록됐을 것입니다.
나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던 재즈 오케스트라에서도 활동했습니다. 재즈 색소포니스트로 유명한 이동기씨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오케스트라였죠. 그런 중 누가 미 8군 무대에서도 통하겠다면서 가보라기에 갔다가 너무 어리다며 퇴짜를 맞았습니다.
실망감을 안고 길거리를 배회했습니다. 배가 고팠지만 수중에 돈 한 푼 없었습니다. 갑자기 통 잊어버리고 지내던 항기 오빠 생각이 났습니다. 오빠는 그때 경기도 평택 서정리의 외삼촌 댁에 있었습니다. 무턱대고 그곳을 향했습니다. 걷다가 졸리면 길가에서 자고 하면서 걸었습니다. 배고픔의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이틀인가 사흘을 걸려 외삼촌 집에 갔습니다.
외삼촌은 근처 오산비행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연결고리가 돼 오디션을 보고 비행장 장교클럽에서 일주일에 한 번 단독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미군 장교들이 내 노래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한국의 셜리 템플’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습니다. 셜리 템플은 당시 미국에서 영화와 뮤지컬을 휩쓸던 여배우이자 가수였지요. 얼마 되진 않았지만 출연료를 받으면 꿀꿀이죽, 보리쌀, 생선 등을 사 갔습니다. 그럭저럭 잘 지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서울 영화사에서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김지미씨가 주연하는 영화 ‘햇빛 쏟아지는 벌판’에 출연하자는 것입니다. 아역이었지만 역할도 제법 크고 출연료도 괜찮았습니다. 촬영도 하고 심부름도 하면서 여기저기 촬영지로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영화 촬영이 끝나자 다시 길거리로 나서야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날 찾아왔습니다. 을지로입구에서 만난 아버지는 병색이 짙었습니다.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서 아버지는 여름 양복을 입고 떨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습니다.
“복희야, 아버지 이 길로 시골에 간다. 몸이 건강해져서 올라오면 꼭 학교에 보내주마.”
겨울바람이 쌩 하고 담벼락을 쳤습니다. 햇살에 비친 아버지 얼굴에 눈물이 번졌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 모습입니다. 평택으로 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캄캄한 광야에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선한 목자를 찾아야 할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땐 그런 생각을 못했지요. 훗날에서야 선한 목자는 그때도 나를 찾고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영원히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늘 아버지 말입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