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 마을 맥 이어온 서울 西村… 과거·현재·미래 관통하는 유쾌한 상상

입력 2012-02-05 18:47


‘서촌, 땅속에서 만나다’ 조각가 5인의 가상 유물발굴展

서울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서촌(西村)’이라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에 있는 청운동 효자동 통의동 사직동 일대를 일컫는다. 경복궁 북쪽에 있는 삼청동 사간동 안국동 등 ‘북촌(北村)’이 조선시대 한옥의 전통을 잇는 동네라면 서촌은 예부터 문인과 화가 등 예술인들이 많이 태어나 살던 곳으로 지금도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조선시대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인왕산을 배경으로 탄생한 작품이고, 인왕산 자락의 서촌에는 최근 몇 년 동안 미술관과 갤러리가 10여개 들어서 새로운 미술동네를 형성하고 있다.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통의동 일대는 요즘 개발에 앞서 발굴조사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유서 깊은 이곳에서는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 2010년 통의동에 들어선 갤러리시몬은 건물 신축 과정에서 유물이 발굴돼 보존 처리 후 전시장을 오픈할 수 있었다. 대림미술관 입구 재개발 현장에서도 요즘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서촌의 중심에 위치한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가 이런 역사적 현장감과 지역적 특성을 살린 가상유물 발굴전 ‘서촌, 땅속에서 만나다’를 오는 18일까지 연다.

흙을 재료로 테라코타 작업을 하는 조각가 5명이 서촌의 가상유물들을 각자의 스타일대로 발굴해 보여주는 전시다. 다소 엉뚱한 상상에서 출발한 이번 전시는 작가들이 조선 왕실이나 귀족들의 애장품이든, 일반 여염집의 생활도구든 나름의 감수성으로 자신들만의 유물을 발굴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이를 통해 우리의 역사와 시대를 고민해보자는 취지다.

넉넉한 미소 등 현대인들의 모습을 애정으로 빚어내는 김주호(63) 작가는 150년이 흐른 뒤 2012년 현재의 유물을 발굴할 경우 어떤 유물이 출토될지 상상하며 작업했다. 푸근한 여성 이미지를 작업 소재로 삼는 한애규(59) 작가는 유물 ‘반가사유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힘든 세상살이에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이상적인 현대 여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시간은 지속된다’라는 주제로 접시 등 토기를 작업하는 윤명순(57) 작가는 서해 앞바다 보물선에서 발굴된 유물처럼 그릇이 무더기로 겹쳐진 작품을 내놓았다. 날카로운 청동검 유물을 테라코타로 빚어내는 최정윤(48) 작가는 ‘기원’ 등의 작품을 통해 현대인의 희망 같은 것을 이야기한다. 고대 그리스의 ‘비너스’에서 착안한 윤주일(41) 작가의 얇은 인체 작품도 이색적이다.

작가별로 10∼20점씩 출품한 작품들은 서촌에서 언제든지 발굴될 법한, 또는 앞으로 수백 년 뒤 후손이 발굴해낼 수 있을지 모를 가상의 유물들이다. 실제 발굴된 유물인양 시간의 흔적이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막 만들어낸 것처럼 현대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의 통로’를 지나는 기분이 든다(02-725-102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