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48) 1930년대 신학, 신비주의의 대두

입력 2012-02-05 17:51


일제의 암담한 현실에서 ‘거짓 예언’ 창궐

1930년대 한국교회 신학의 두 번째 변화는 신비주의의 대두였다. 신비주의 운동이 전개된 것은 1920년대의 경제적 시련과 일제의 정치적 압제 하에서 현실을 초극하려는 탈 역사적 신앙의 내면화 현상이 빚은 결과로 보인다. 역사 현실이 암담하면 암담할수록 현실 도피적 주관주의나 신비주의가 창궐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1930년대 한국교회에는 신비주의만이 아니라 신비적 열광주의, 거짓 계시운동(위경운동·僞經運動)이 일어났다.

신비주의적 종파운동이나 위경운동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미성숙을 반영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서양기독교전통에 대한 이해와 주관적 신령주의의 폐해를 성찰할 수 있는 신학적 소양이 부족했다. 이것이 입신, 접신, 예언, 분별없는 방언 등 신령주의적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이었다.

‘한국선교연감’(The Korean Mission Year Book for 1932)은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현재 한국교회에는 자신들이야 말로 참 예언자라 자처하는 남녀의 해괴한 일군(一群)이 있다. 교회가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식별하는 슬기가 없어 비통할 따름이다. 영화(靈化)운동이 진행되고 있지만, 지적인 신앙보다는 파타티시즘에 기우는 경향이 너무 많다. 어떤 이는 자신을 그리스도라 칭하고 한 여인은 자신이 ‘새 주’라 주장한다. 우리는 열광적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지적(知的) 신앙을 함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30년대 한국교회에는 주관적 신앙 혹은 신앙의 내면화 현상이 고조되었고, 이것은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발전했다. 이런 형태가 객관적 신앙의 규범인 성경 보다는 소위 ‘새 예언’을 말하는 거짓 계시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 한 가지 사례가 황국주(黃國主) 집단이었다.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인 황국주는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수학한 일이 있다. 1933년경부터 자신의 주장을 계시화 하고 추종자를 얻음으로써 열광적인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백일간의 기도 후 묵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신언(神言)의 대변자로 자처하였다. ‘한국의 주’라고 자처하고 외형도 머리를 길게 내리고 수염을 길러 흡사 예수님처럼 꾸미고 예수님의 화신(化身)으로 자처했다. 1933년 5월 ‘영계’(靈界)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신비적 거짓계시운동을 전개했다. 1935년에는 새 예루살렘 도성을 찾아 순례자의 길을 떠난다며 함경도와 강원도를 거쳐 서울로 향하게 되자 많은 군중이 그를 추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새로운 계시로 주장하고, 결혼관계 이외의 이성관계도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거짓 계시는 도덕적 방종을 정당화한 것이다. 후일 그는 삼각산에 기도원을 세우고 소위 영체 교환이란 이름의 혼음(混淫)교리를 설파했는데, 통일교 혼음교리의 선례가 된다. 황국주 일파는 1933년 안주(安州)노회와 평서노회에 의해 ‘위험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1930년대 신비주의 운동의 또 하나의 사례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일어난 위경운동이었다. 한국의 원산은 독일의 쯔비카우(Zwickau)와 비교될 수 있는 종교적 성향이 짙은 신령한 도시였다. 1903년 한국교회 부흥의 시원지이기도 했던 이곳에서 신비적 체험과 예언, 방언을 중시하는 신령파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원산의 감리교회 유명화, 장로교회 목사 한준명, 원산 신학산(神學山)의 백남주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유명화(劉明化)는 원산 감리교회 여신도였는데 1927년경 입신의 체험 후부터 예언 활동을 시작하여 예수가 자기에게 친림(親臨)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방언, 예언, 거짓 계시를 통해 자신을 특수화하고 여러 곳에서 집회를 인도하며 교회를 소란케 하였다. 특히 1932년 영흥교회 집회에서는 예수처럼 외양을 꾸미고 이유신(李維信)이라는 여성에게 강신극(降神劇)을 자행하기도 했다.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나 원산지방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일군의 무리를 형성하였다.

유명화의 신비운동에 가담한 사람이 한준명(韓俊明)이었다. 간도 출신인 그는 당시 함남노회 전도사였다. 1932년 11월 유명화의 파송을 받고 평양에 간 그는 3일간 입류강신극(入流降神劇)을 자행하며 거짓 예언을 주도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평양노회는 1932년 11월 28일 그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한준명을 추천한 이가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였는데, 이 일로 문제가 되었고 그도 비난받기 시작했다.

백남주(白南柱, ?∼1948) 또한 유명화와 한준명과 결탁하여 신비주의적 거짓예언 활동에 가담했다. 평양신학교 제25회(1930) 졸업생인 백남주는 ‘원산 신학산’이라는 일종의 사설 신학교육원을 설립, 운영 하였던 환상적 종교가였다. 1933년 1월에는 ‘새생명의 길’이라는 50여 항에 이르는 구원관을 피력한 저서를 출판했다. 지금은 소실되었으나 이 책에서 그는 “구약은 생명을 들려주고 신약은 생명을 보여줄 뿐이지만, ‘새생명의 길’은 생명을 받게 한다”며 자신이 제시하는 것이 완전한 계시라는 점을 암시했다. 백남주는 성경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계시의 계속성을 주장하였다. 백남주는 유명화와 이유신과 결탁하여 교회분립을 의도했다. 1933년 당시 이 교회는 평양과 안주, 원산 등 10여개 처에 산재했고, 교인수는 1000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는 평북 철산(鐵山)의 자칭 ‘새 주(主)’라는 김성도(金成道)와 결탁하여 성주교회(聖主敎會)라는 또 다른 분파를 세운 일도 있다. 교회사의 모든 시기에서 그러했듯이 새 예언, 혹은 새 계시는 언제나 매혹적이었다. 따라서 대중을 유혹했지만 이런 신앙운동은 건실한 기독교를 불순한 집단으로 변질시켰다. 신비주의는 항상 위경운동으로 화할 위험이 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