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⑤ 만주 방랑과 해방 (끝)

입력 2012-02-03 18:22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 그늘에 들다

백석은 27세 때인 1939년 말, 중국 만주로 건너가 1945년까지 5년여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의 중국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함경남도 함흥영생고보 교사 시절인 1938년 5월, 졸업반 학생들을 인솔해 2주간 일정으로 중국행 수학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뤼순(旅順)에 도착해 신경(長春), 북간도(北間島), 도문(圖們)을 거쳐 함경북도 주을 온천에서 마지막 1박을 하고 함흥으로 돌아온 긴 여행길이었다. 백석은 이 여행을 통해 시인으로서 자유롭게 유랑할 수 있는 땅으로 만주를 찜해 놓았던 것이다.

그가 1940년 6월 ‘인문평론’에 발표한 시 ‘수박씨, 호박씨’의 첫 구절 “어진 사람이 많은 나라에 와서/ 어진 사람의 즛(짓)을 어진 사람의 마음을 배워서/ 수박씨 닦은 것을 호박씨 닦은 것을 입으로 앞니빨로 밝는다”에 등장하는 어진 사람이란 근대문명의 속도에 염증을 느낀 그 자신이 동경했던 노자와 공자와 도연명의 땅에 살게 됐다는 일종의 신고식 같은 시편이다. 백석의 거처는 지금의 창춘(長春)인 ‘신경시 동삼마로(東三馬路) 시영주택 35번지’ 황씨 방(方)이었다.

1940∼41년 신경에서 발행된 ‘만선일보’ 학예부 문예담당 편집자였던 고재기(전 전남대 박물관장)씨가 한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황씨 방’의 황씨는 당시 만주국 특허국장을 지낸 황재락씨다. 황씨는 자유당 시절 특허청장을 지낸 인물이었고, 아들 종률(자유당 시절 재무장관 역임)씨는 백석과 함께 ‘방응모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에서 유학한 친구였다. 당시 종률씨는 만주국 경제부 참사관으로 있었기에 백석을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고씨와 종률씨의 동생 중률씨는 보성전문학교 법학부 동기였던 터에 고씨의 증언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 고씨는 백석의 성격이 워낙 깔끔해 친구 아버지 집에 머물지 않고 주소지만 그곳에 둔 채 다른 곳에서 하숙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백석은 주말이면 집을 구하기 위해 신경 근교의 러시아인 마을을 오가곤 했다는 것이다.

만주 생활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백석에게 도움을 준 대표적인 인물이 만선일보 편집국장 홍양명씨다.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만선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외신부장, 경성방송국 초대 방송국장을 역임했던 홍씨는 안수길 같은 작가들도 원고료 없이 글을 쓰던 만주 시절에 망명시인이라 할 백석에게는 용돈을 대주기 위해 청탁을 했다. 백석은 그 덕분에 만선일보에 번역소설 ‘홋새벽’을 비롯해 ‘요설’ ‘슬픔과 진실’ 등 산문 3∼4편을 실을 수 있었다.

신경 시내 러시아 다방에서 백석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는 고씨는 백석이 신경에서 ‘박애의원’을 하던 모 의사의 집에서 기숙하기도 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동순 영남대 교수는 “이 의사가 수필가 겸 소설가로 활동한 정근양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근양이 백석을 쫓아 만주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백석은 1940년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근무한다. 고씨는 “당대의 갑부 윤치호의 조카 윤모씨가 당시 만주국 국무원 자료과장으로 있었다”며 “백석은 윤씨와 마음이 잘 맞아 그 밑에서 외국어 번역 촉탁으로 근무했다”고 회고했다. 신경에서 백석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작가 송지영(1916∼1989·전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의 술회에 따르면 백석은 그 당시만큼은 고향 부모에게 매달 약간의 송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괜찮았다. 하지만 백석은 6개월 후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곧바로 사직한다.

백석은 일제의 강압이 거세지자 북만주의 산간 오지를 기행하며 원주민인 오로촌과 교류한다. 이 때의 경험은 시 ‘북방에서’에 담겨 있다. 하지만 생활인으로서의 백석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1941년 4월 ‘조광’ 에 발표한 시 ‘귀농’이다.

“백구둔(白拘屯)의 눈 녹이는 밭 가운데 땅 풀리는 밭 가운데/ 촌부자 노왕(老王)하고 같이 서서/ 밭최뚝에 즘부러진 땅버들의 버들개지 피어나는 데서/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나는 땅임자 노왕한테 석상디기 밭을 얻는다// 노왕은 집에 말과 나귀며 오리에 닭도 우울거리고/ 고방엔 그득히 감자에 콩 곡식도 들여 쌓이고/ 노왕은 채매도 힘이 들고 하루 종일 백령조(百鈴鳥) 소리나 들으려고/ 밭을 오늘 나한테 주는 것이고/ 나는 이젠 귀치않은 측량도 문서도 싫증이 나고/ 낮에는 마음 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 싶어서/ 아전노릇을 그만두고 밭은 노왕한테 얻는 것이다”(‘귀농’ 부분)

명편으로 꼽히는 ‘흰 바람벽이 있어’ ‘국수’ ‘촌에서 온 아이’가 ‘문장’지에, ‘조당에서’ ‘두보나 이백 같이’가 ‘인문평론’에 각각 발표된 것도 1941년 4월이었다. 이 시기에 백석은 신경에 와 있던 시인 박팔양의 ‘여수시초(麗水詩抄)’ 출판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석하고 역시 만주에 머물던 소설가 김사량, 송지영, 안막 등과도 교제한다. 토머스 하디의 장편 소설 ‘테스’를 서울 조광사에서 번역 출간하기 위해 경성을 잠시 다녀가기도 했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丹東)으로 옮겨간다. 고재기씨는 백석의 안동행에 대해 “소설가 염상섭이 당시 안동시청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회고했다. 백석은 안동에서는 세관 업무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백석은 1942년부터 1946년에 걸쳐 시를 썼을지언정 단 한 편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만큼 일제의 감시가 엄중한 시기였다. 1944년엔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산간 오지의 광산에 들어가 일했다고도 한다. 백석은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아 안동에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온다. 참으로 쓸쓸한 망명시인의 귀국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귀국이라는 의미보다 거처를 옮겼다는 표현이 합당할지도 모른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헌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중략) /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위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부분)

이 시는 백석이 1948년 10월 창간된 ‘학풍’에 발표한 해방공간에서의 마지막 작품이다. 월간 종합지 성격의 ‘학풍’은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했는데 편집 주간은 조풍연(1914∼1991)이었다. 잡지 뒤에 붙은 출판부 소식엔 “서정시인 백석의 백석시집이 출간된다.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은 과연 얼마나 이 고고(孤高)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 또 얼마나 능가할 수 있었더랴. 흥미있는 일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을유문화사에서 백석시집 간행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시집은 간행되지 않았다.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는 “이 시는 친구 허준이 해방 이전부터 갖고 있다가 백석을 대신해 발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만약 그렇다면 편집 후기에 그런 사실이 언급됐을 텐데 그런 언급은 없다”며 “이 시가 보여주는 형식적인 안정감과 유장한 호흡, 그리고 예전에 볼 수 없는 콤마와 마침표가 찍혀 있다는 점에서 해방 후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탕하다”고 말했다.

사실상 백석의 명편에 해당되는 시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남북은 분단됐고 백석은 북한에 남았다. 백석의 백석다운 시가 여기서 중단된 것으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자 우리 문학의 비극이다. 그러나 문학은 상실이라는 토양에서 성장한다. 천재시인 백석이 노래 부른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는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100년을 비추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화(燈火)이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도움말 주신 분(가나다 순)

김재용(납북월북작가 전문가·원광대 교수)

이동순(시인·영남대 교수)

이숭원(한국시학회 회장·서울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