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말년의 백석… 알려진 행적 별로없어, 北 문학계 주류와도 거리
입력 2012-02-03 18:22
해방 이후 백석의 행적은 알려진 게 별반 없다. 다만 그가 1946년 고당 조만식의 러시아어 통역비서를 맡아 평양에 거주했다는 증언이 있긴 하다. 백석의 일본 아오야마학원 후배이자 백석 권유로 하얼빈 북만학원대학 노문과에서 수학했던 전 국회의원 고정훈(1920∼1988)의 회고가 그것. 그는 1946년 12월 만주에서 돌아오는 귀국길에 아들이 열병으로 죽었고, 아들 시신을 안은 채 평양 대동강변 돌각담 집에서 살고 있던 백석을 찾아가 장례를 논의했다고 한다.
1947년 12월 발간된 ‘조선문학’ 2집에 실린 북조선 문예총 명단에 백석은 외국문학 분과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시 분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북한 문학계의 주류적 흐름과 거리가 있음을 추측케 한다. 백석은 한국전쟁 이후 아동문학 영역에서 활동한다. ‘조선문학’ 1956년 5월호에 실린 ‘동화 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등 세 편의 산문을 비롯, ‘아동문학’ 1957년 4월호에 실린 ‘멧돼지’ 등 동시 4편이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1962년 5월 11일 ‘문학신문’에 실린 ‘프로이드주의-쉬파리의 행장’을 끝으로 북한의 어떤 매체에서도 백석의 글은 찾아볼 수 없다.
백석 연구자 송준(50·자유기고가)이 2001년 공개한 백석 부인 이윤희씨(1945년 말 평양에서 결혼)의 편지에 따르면 말년의 백석은 평양시 동대원 구역에 살다가 1959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축산반에서 돼지와 염소를 쳤다. ‘붉은 편지 사건’이란 북한에서 ‘천리마 운동’이 한창이던 1959년 당성(黨性)이 약한 인민들을 지방 생산현장으로 내려 보낸 것을 말한다.
부인 이씨는 “글 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던 백석은 농사일을 제대로 못해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하루에 한 사람을 열 번을 만나도 가슴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곤 할 정도로 품성이 겸손해 삼수군 사람 가운데 백석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전했다.
이후 백석은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청소년들의 문학창작지도에 힘쓰다가 1996년 1월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씨의 편지를 대필한 장남 화제씨는 “아버지가 남겼던 번역 소설 원고도 이젠 많은 세월이 흘러오면서 다 휴지로 써버렸다”고 전했다. 백석이 남긴 원고가 유족들의 밑씻개로 쓰이다니, 문학도 결국 휴지로 치환되고 만다는 것인지, 쓸개즙 같은 쓰디쓴 맛이 오래 가시지 않는다.
한편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 백석의 정확한 사망일자와 관련, “지금까지 1995년 1월 사망설도 제기됐으나 1996년 1월 7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최근 중국 옌볜 조선족으로부터 들었다”며 “이는 북한에 거주하는 백석의 유족들이 조선족 지인에게 전한 소식”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유족들이 이 지인에게 1월 7일을 아버지 기일이라고 전해온 점으로 미뤄 백석의 사망 시기를 둘러싼 더 이상의 논란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