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이 아닌 듯한 처음인 곳이 좋다”… 이시영의 열두번째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

입력 2012-02-02 18:26


약관 20세에 등단해 시력 40년을 넘긴 중견시인 이시영(63·사진)의 열두 번째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는 나이가 들수록 그 표면적이 넓어지는 시인의 자의식과 자기 성찰의 풍경을 보여준다.

시인의 가슴에 매어진 현(弦)을 울리는 자의식과 자기 성찰의 빛깔은 황혼을 배경으로 더욱 익어간다.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으스스 몸이 시릴 때, 아니 내 삶이 내 삶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때, 그것이 또한 오로지 남의 탓이 아닐 때 등을 돌리고 서면 거기 안서호의 황혼녘에 오리들이 몇 유쾌한 직선을 그으며 나아가고 있었나니 (중략) 그때쯤이면 해가 풍덩 가라앉은 저녁 안서호의 따스한 물결이 내 가슴 통증께로 조금씩 밀려오곤 해 나는 서둘러 텅 빈 가방을 챙겨 의대에서 오는 여섯시 막차 퇴근 버스를 타러 언덕길을 총총히 내려가곤 했다”(‘저녁의 몽상’ 부분)

안서호가 내려다보이는 단국대 천안캠퍼스에서 강의를 마친 시인은 문득 오리들의 자연스런 유영을 보면서 가슴의 통증을 느낀다. 오리는 물위에 떠 있기 위해 얼마나 죽어라고 갈퀴질을 해대고 있는가 하는 상념이 개입되면서 오는 통증이자 인생의 한 문턱을 넘어선 자의 회한이 묻어나는 시편이 아닐 수 없다. 그 통증과 회한은 시인을 오십 년 저편의 추억으로 잠겨들게 한다.

“어렸을 적 소 몰고 섬진강에 나가 멱 감다가 급류에 휩쓸려 그 무섭다는 용소에 빠진 적 있지. (중략) 모래밭에 거꾸러진 채 잠시 혼절했다가 먹은 물을 다 토하고 나서 올려다보니 거기 농업학교에 다니는 무쇠 팔뚝의 육촌형이 씨익 웃고 서 있었다. 새삼 그 형의 건장한 미소가 그리워지는 이순의 아침이다”(‘이순의 아침’ 부분)

추억의 영상으로 떠오르는 육촌형의 건장한 미소를 떠올리는 시인은 이제 눈길을 걸으며 뒤를 돌아본다. 하지만 아무도 없다. “싸락눈 내리는 저녁, 길을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부르는 사람은 없고 그때 막 그런 생각이 드는 것 있지. 누군가 내 생을 다 살아버렸다는 느낌! 그런데 그 누군가는 누구이며, 과연 나에게 생 같은 것이 있기는 있었을까?”(‘싸락눈 내리는 저녁’ 부분)

이번 시집에서 진정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나에게 생 같은 것이 있기는 있었을까”라고 반문하는 적막의 무게이자 생애를 건 질문 같은 것이다. “어머니 앓아누워 도로 아기 되셨을 때/ 우리 부부 출근할 때나 외출할 때/ 문간방 안쪽 문고리에 어머니 손목 묶어두고 나갔네/ 우리 어머니 빈집에 갇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중략)/ 하루종일 이 세상을 혼자 견딘 손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네”(‘어머니 생각’ 부분)

이순을 넘긴 시인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혼자 빈집에 남아 있던 그 적막한 공간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문고리에 묶어둔 어머니의 손목은 시인 자신의 손목이기도 했을 것이니, 시 ‘저녁의 몽상’의 한 구절인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고 으스스 몸이 시릴 때, 아니 내 삶이 내 삶으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 때”라는 시구는 빨갛게 부어 오른 채 세상과 홀로 맞선 어머니의 손목과 다시 맞물리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시집이 황혼의 풍경으로만 펼쳐지고 있는 건 아니다.

다음 시편은 이번 시집이 건져 올린 뜻밖의 득의를 맛보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기가 어디지 하고 아주 잠깐 놀랄 때가 있다. 서울이고 마포고 십칠 년째 살아온 그 방 여전한 침대건만 나는 이 낯선 영혼의 시간, 이 세상이 아닌 듯한 처음인 곳이 좋다. (중략) 그때 저만치 어디에서 수탉의 울음소리가 째지듯 들려왔다”(‘아침의 몽상’ 부분)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