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원 안의 두 중심, 너와 나는 순환한다… 장석주 시집 ‘오랫동안’

입력 2012-02-02 18:27


‘양과 음’ ‘너와 나’는 모든 것을 낳는 두 개의 구멍이다. 둘을 하나로 묶은 ‘우리’는 서로의 자장 안에 든 두 개의 중심이다. 그래서 두 개의 중심을 갖는 타원만이 ‘나’라는 에고(ego)에서 벗어나 내가 아닌 타인과 내 것이 아닌 물상들을 태어나게 하는 모체가 된다.

장석주(57·사진) 시인의 신작 시집 ‘오랫동안’(문예중앙)에 수록된 60여 편의 시들은 한결같이 ‘주역시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주역시편’의 작동 원리란 다름 아닌 두 개의 중심을 갖는 타원에의 지향이다.

“눈길을 걸어서 식당으로 가는 길,/ 가정식 백반을 파는 식당은 은하의 저쪽에 있다./ 청양고추 하나를 된장에 푹, 찍어 먹는/ 눈보라 치는 이 아침,/ 가정식 백반 일인분을 먹는/ 내게는 가정식 백반의 근심과 기쁨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가정식 백반-주역시편 1’ 부분)

이 시에서 주역의 작동 원리, 즉 무한한 변화를 생산하는 ‘둘의 가능성’을 발견하겠다고 눈을 부릅뜰 필요는 없다. ‘주역시편’이란 부제는 어디까지나 시인 자신의 기획일 뿐, 감상자는 이 시편이 드러내는 삶에 대한 관조와 비의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를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왕에 ‘주역시편’이라고 했으니 ‘나’와 ‘너’라는 두 개의 중심이 어떻게 시에 작동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왜 너는 늑대가 아니라 늑대가 다니는 황폐하고 고독한 길이 되려고 하느냐 네가 스스로 네 마음을 극소화시켜 횡경막 아래 숨기는구나 이 극소화의 분할로 너는 끝끝내 발견되지 않은 현상이다 (중략) 나는 서리고 너는 얼음인가 나는 꽃이고 너는 열매인가 나는 죽고 너는 사는가 나는 갈 길이고 너는 돌아오는 길인가”(‘잎과 열매-주역시편 133’ 부분)

내가 있는 이쪽과 네가 있는 그쪽은 서로 반대다. 내가 서리와 꽃이면 너는 얼음이고 열매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두 개의 중심, 즉 타원 안에 존재하지만 내가 출현하면서 ‘너’라는 존재는 절반으로 줄어들고 만다. ‘너’와 ‘나’는 생사와 이별을 나누어 가진 피조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를 통해 시인이 탐구하는 건 결국 신의 피조물인 인간 그 자체이다.

“돌아서면, 거기 네가 서 있다./ 아침엔 다리가 넷이다가 낮엔 둘, 저녁엔 셋이 되는 하루여./ 마치 태어나서 미안하다는 얼굴이구나./ 밥과 젊음 없는 젊음은 우리를 자주 속여/ 하루를 지루함 속에 주저앉힌다.”(‘하루-주역시편 202’ 부분)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