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혹한

입력 2012-02-02 18:24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65년 영화 ‘닥터 지바고’는 볼 때마다 새롭고, 여운이 달라지는 영화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이 작품은 국내에는 1968년, 1978년과 1987년, 1999년에 상영됐다. 대략 10년 안팎을 주기로 재개봉된 셈이다.

영화를 대하는 시각이나 취향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78년 처음으로 닥터 지바고를 접했던 고교생에게는 유리 지바고와 라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가장 뇌리에 남았다. 러시아 민속현악기 발랄라이카를 사용한 모리스 자르의 잔잔한 영화음악 ‘라라의 테마’도 감성을 자극했다.

87년에는 사랑 이야기의 이면에 러시아 역사가 관통하고 있음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말기 차르 체제, 1차 세계대전, 2월 혁명과 제정 붕괴, 10월 혁명과 내전 등으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시대상황 속에서 인간 군상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라라의 애인으로 인텔리겐차에서 볼셰비키 군 지휘관이 됐다가 체포돼 비극적 생을 마감하는 파샤 역은 더욱 그러했다. 당시 우리 사회도 박종철씨 고문 치사사건과 6월 항쟁 등을 겪던 격변기였다.

하지만 닥터 지바고의 압권은 역시 러시아의 대자연이었다. 혹한을 뚫고 광활한 설원을 달리는 기차, 두 연인이 겨울을 보낸 우랄산맥 자락 바리키노의 오두막집, 라라를 싣고 눈길 너머로 사라지는 마차를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기 위해 얼음결정이 두텁게 얼어붙은 창문을 쓸던 장면은 하나같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라라를 떠나보내던 유리의 고독에 찬 허탈한 눈빛은 순백의 겨울 서경 때문에 더 가슴을 시리게 했다. 실제 촬영은 스페인과 핀란드에서 이뤄지긴 했지만 러시아의 겨울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2일 서울의 최저기온이 영하 17.1도를 기록하는 등 입춘을 목전에 두고 전국에 혹한이 찾아왔다. 1957년 2월 11일 이후 55년 만에 최저치라고 한다. 수도가 터지고 전철이 고장 나고, 임시휴업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가 잇따랐다. 지구온난화로 제트기류 기능이 약해지면서 북극의 냉기가 내려오는 바람에 동유럽과 중국 북부, 일본 등 전 세계적으로 이상한파가 발생했다고 한다.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라지만 팍팍한 형편에 겨울나기는 쉽지 않다. 사방이 눈으로 뒤덮이고 매서운 바람이 불면 조건반사처럼 닥터 지바고가 떠오른다. 다시 영화를 접하면 눈부신 겨울풍광 뒤에 가려진 민초들의 삶도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