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6) 대학자 필로, 로마에 가다
입력 2012-02-02 18:17
로마황제 면전서 공격받고 쫓겨난 유대 대표 “걱정할 것 없소”
카이우스가 로마의 황제가 된지 3년 되는 AD 40년은 로마 제국의 위기였다.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했던 황제는 모든 속주에 자신을 위한 신전을 건립하고 자신의 신상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지금까지 여러 신을 섬기던 나라들은 그 신들 중에 신 하나가 더 생긴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의 경우에는 그것이 달랐다. 율법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5)
아브라함의 자손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여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2)
그리고 우상을 박멸하라고 하셨다.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신 7:5)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다윗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 다급하여 사람을 가리지 않고 부하로 삼았다. 그의 휘하에 블레셋인과 크레타인의 외인부대가 있을 정도였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관할하고”(삼하 8:18)
그의 수하에는 가나안에 속하는 헷 사람도 있었다.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삼하 11:3)
다윗은 그 밧세바와 간통하고 우리아를 죽여 큰 죄를 범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윗의 뒤를 이은 왕은 밧세바가 낳은 솔로몬이었다. 솔로몬 역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 서슴치 않고 가나안의 두로 사람 히람을 기용했다.
“솔로몬 왕이 사람을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왕상 7:13∼14)
그러다가 솔로몬 자신이 결국 가나안의 여신에게 미혹된다.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왕상 11:5)
솔로몬 다음의 왕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은 북과 남으로 갈라지고 북 이스라엘이 먼저 바알과 아세라의 나라가 되어 앗수르에게 멸망당했다. 그 후에 남의 유다도 이방의 신들을 섬기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다. 바벨론에 잡혀갔던 백성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호의로 BC 538년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유대를 다스리던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Ⅳ세는 BC 167년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다.
“안티오쿠스 왕은 번제단 위에 가증스러운 파멸의 우상을 세웠다.”(마카비상 1:54)
이듬해 모데인 마을의 제사장 맛다디아는 다섯 아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부친의 지휘권을 이어받은 3남 유다 마카비는 BC 164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의 제우스 상을 철거한 후 성전을 정화했다. 기슬래월의 25일의 그 날은 후일 수전절로 지켜졌다. 그리고 유다 마카비의 조카 요한 힐카누스는 새로운 제사장 국가 즉 하스몬 왕조를 세웠다. 그 하스몬 왕가의 마리암네와 결혼했다가 로마의 후원으로 유대왕이 된 이두매인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대한 성전을 건축했으나 성전 문에 세운 금독수리 상 때문에 봉변을 당했다.
“청년들이 한낮에 성전으로 달려가 금독수리상을 끌어내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끼로 박살을 내버렸다.”(유대고대사 17-6)
헤롯이 그 주동자 2명을 처형하고 죽자 백성들은 그의 후계자가 된 아켈라오에게 그들의 처형을 막지 못한 대제사장을 바꿔 달라고 시위를 시작했다. 아켈라오가 1개 연대의 병력으로 그들을 진압하려 하자 시위가 격화되었고 아켈라오는 전군을 동원하여 시위자 3000여 명을 살해했다. 이 일로 인하여 아켈라오가 해임되고 유대는 총독의 관할 구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유대인의 성전에 황제의 신상을 세우고 섬기라고 한 카이우스의 명령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당장 예루살렘도 문제지만 전 세계에 분포된 유대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군을 거느리고 유대로 진격하라.”(유대고대사 18-8)
카이우스 황제는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를 수리아 총독으로 임명하고 신상 건립명령에 불복하는 유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사람들은 카이우스 황제를 ‘칼리굴라’라고 불렀다. 그것은 작은 군화라는 뜻이고, 철없이 날뛴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페트로니우스는 로마군 2개 군단을 동원하여 유대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유대인 대표들이 총독을 찾아와 공격을 강행하면 그들도 결사항전할 것을 통고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도 신상 건립을 반대하며 찬성하는 헬라인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충돌이 생기게 되자 양쪽에서 3명의 대표를 뽑아 카이우스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유대고대사 18-8)
황제의 신상 건립에 대해서 유대인과 헬라인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것은 그 이면에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잡아온 유대인들이 곡물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헬라인들이 그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모든 일에 유대인과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헬라인 쪽에서는 아피온이라는 자가 대표로 뽑혔고, 유대인 쪽의 사절단 단장으로는 학자 필로 유데우스가 가게 되었다. 그는 저명한 대학자일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인 알렉산더 리시마코스는 행정장관이며 손꼽히는 부호이므로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막상 로마에 도착한 필로는 크게 낭패를 당했다. 헬라인 대표로 온 아피온이 황제 앞에서 유대인들은 근본적으로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며, 로마의 지배를 받는 모든 속주의 백성이 황제를 위해 제단과 신전을 건설하고 한결 같이 황제를 신으로 섬기고 있는데, 유독 유대인들만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금지하고 황제를 위해 신상 세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카이우스 황제는 대학자인 필로의 말을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당장 나가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걱정할 것 없소.”
황제에게 모욕을 당하고 밖으로 나온 필로는 동행자들에게 말했다.
“카이우스가 우리에게 분을 품고 있는 것은 확실하나 이미 하나님을 자기 적으로 삼은 것이니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니오. 그러니 우리가 다 같이 용기를 내도록 합시다.”(유대고대사 18-8)
소설 ‘마르코스 요안네스’를 구상할 때 필자는 마가가 AD 30년 알렉산드리아에 유학간 것으로 설정하고 그가 언제쯤 유대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학자 필로가 유대인 대표로 로마에 간 AD 40년을 그 때로 잡았다. 유대인 대표단과 헬라인 대표단이 황제를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교역의 주도권을 위한 양측의 대립은 이미 폭발 직전이었고 실제로 여기저기서 충돌이 시작되고 있었다. 겟세마네에서 겉옷을 벗어던지고 도망쳤던 마가가 폭동이 예상되는 알렉산드리아에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 아니고는 유대인을 굴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수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가 카이우스 황제에게 보고서를 썼다.
“그러나 황제께서 그들을 전멸시키신다면 폐하께 들어가는 세금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며 앞으로 오래도록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유대고대사 18-8)
그러나 카이우스는 자신의 신상을 세우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페트로니우스 총독에게 유대 공격을 재촉했다. 필자의 소설에서 마가는 바로 그런 긴장된 시기에 10년간의 유학 생활을 끝내고 유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곳에도 물론 위험은 도사리고 있었으나 어머니가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