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하늘과 바다, 육지 향한 핏빛 그리움… 남성·여성미 공존하는 영광 해안도로 드라이브

입력 2012-02-01 17:59


전남 영광에서는 바다가 옷을 벗어야 더욱 황홀하다. 잿빛 바닷물이 칠산도로 물러나자 드넓은 갯벌이 눈부신 나신을 드러낸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갯벌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피부색을 바꾼다. 회색에서 오렌지색으로, 오렌지색에서 붉은색으로…. 여인의 둔부처럼 풍만하고 유려한 곡선의 갯벌이 수줍은 듯 홍조를 띠자 보랏빛 해무가 커튼처럼 갯벌의 속살을 가린다.

서해안 해안선 중 남성미와 여성미가 공존하는 곳은 영광이 유일하다. 약 90㎞에 이르는 영광 해안도로 드라이브의 출발점은 북쪽에 위치한 홍농읍의 가마미해수욕장. 한때 호남의 3대 피서지로 이름을 날렸지만 영광원전이 들어서면서 반달 모양의 백사장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주말과 휴일에 개방되는 가마미해수욕장 북단의 방파제는 천혜의 바다 낚시터. 영광원전에서 사시사철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민어 농어 광어 숭어 등이 떼를 지어 몰려들기 때문이다. 가마미해변과 이웃한 계마항 앞바다에는 쥐섬 고양이섬 호랑이섬으로 불리는 작은 섬들이 아옹다옹 다투듯 앉아 있는 모양새가 미소를 머금게 한다.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은 일찍이 영광을 가리켜 ‘호불여 영광(戶不如 靈光)’이라고 했다. ‘호수(戶數)는 영광만한 데가 없다’는 뜻으로 당시 영광은 호남에서 나주 순천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았다. 영광굴비의 고향인 법성포는 조선시대 조창이 있던 곳으로 영광에서도 가장 번화한 곳. 500여 가게마다 한겨울 바닷바람에 꼬들꼬들 익어가는 굴비가 곶감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진풍경을 연출한다.

법성포에도 경북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천 회룡포처럼 물돌이동이 존재한다. 대덕산(240m) 정상에 올라야 보이는 법성포 물돌이동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강 모양의 S자 바다가 만든 절경. 모내기 직전 논에 물을 채우거나 황금들녘으로 변한 한시랑뜰이 칠산 앞바다 낙조와 어우러져 황홀한 풍경을 연출한다.

대덕산을 지나 산길을 돌면 바로 백수해안도로로 이어진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백수해안도로는 리아스식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17㎞ 길이의 해안도로. 해안 굴곡을 따라 구불구불 오르내리는 모양새가 남성의 근육을 닮았지만 이곳에서 보는 칠산 앞바다는 사뭇 여성적이다.

여름에는 분홍색 해당화가 만발하고 겨울에는 붉은색 해당화 열매가 선명한 백수해안도로는 칠산 앞바다 노을이 아름다워 노을길로 불린다.

칠산 앞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과 드넓은 갯벌이 시시각각 그리는 해질녘 풍경은 한 폭의 그림. 백수해안도로를 오전이 아닌 오후에 달려야 하는 이유다.

언덕을 넘고 산모롱이를 돌아 칠산정에 오르면 S자를 그리는 백수해안도로와 괭이갈매기 서식지로 유명한 괭이섬과 칠산도 등 영광의 섬들이 아스라하게 펼쳐진다. 칠산정에서 영광노을전시관까지 2.3㎞ 구간에는 목책산책로인 ‘건강365계단’이 설치돼 있다. 도로와 바다 중간쯤 높이에 설치된 산책로는 바다를 더 가까이에서 만나는 통로. 이곳에서는 검은 갯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파도의 울음소리조차 감미롭다.

진주 정씨 열부 12명이 정유재란 당시 왜군을 피해 바다로 몸을 던진 정유재란 열부순절지를 지나면 해안도로는 노을의 고장 영광에서도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는 백암전망대에 닿는다.

전망대 끄트머리의 노을정에서 만나는 해안선과 칠산 앞바다는 장쾌하면서도 서정미가 듬뿍 묻어난다. 전망대 옆의 하얀색 카페는 연인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창밖 풍경이 낭만적이다.

백암전망대에서 2㎞를 달리면 마을 모양새가 동백꽃을 닮은 동백마을이 나온다. 도로 아래에 위치해 자칫 지나치기 쉬운 동백마을은 영화 ‘마파도’ 촬영지로, 영화처럼 실제로 할머니들이 많이 산다. 급경사의 좁은 내리막길을 걸어 마을에 진입하면 백수해안도로에서 보던 바다와는 전혀 다른 이색적 풍경이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동백마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지 시선의 높낮이 때문이다. 차를 타고 높은 도로를 달리며 바라보던 바다와 달리 아래에서 보면 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절벽과 갯벌, 그리고 칠산도를 비롯해 크고 작은 섬들이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그 옛날 ‘조기 파시’ 때 조기잡이 어선들이 밤에도 대낮같이 불을 밝히던 장관은 기억 속으로 사라졌지만 동백꽃보다 붉은 노을은 예전 그대로다.

예로부터 영광은 쌀, 소금, 목화, 눈이 많아 ‘4백(白)의 고장’으로 불렸다. 산업화 영향으로 목화밭은 없어졌지만 백수읍과 염산면에 들어서면 눈 덮인 청보리밭과 퇴락한 소금창고가 낭만적인 염전이 끝없이 펼쳐진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탄생한 땅으로 이곳의 나지막한 산들은 모두 섬이었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맞닿은 염산에서 해안선이 가장 멋스런 곳은 백바위해수욕장과 두우리갯벌. 갯벌 마라톤대회가 열리는 백바위해수욕장은 석영 성분의 갯바위가 눈부시도록 희어서 붙여진 이름. 백바위해변에서 보면 7개의 크고 작은 무인도로 이루어진 칠산도가 징검다리처럼 가지런하다.

갯벌체험장으로 유명한 두우리갯벌은 물이 빠지면 인근 섬까지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 두우리갯벌에서 백바위해변까지는 도로를 따라 목책산책로가 설치돼 있다. 야월리의 야월교회와 설도항의 염산교회는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수백 명의 기독교인들이 학살된 순교지.

영광 최고의 해안선은 함평군과의 경계이자 바다 건너 무안군의 도리포가 지척인 향화도항. 향화도는 원래 섬이었으나 간척을 통해 육지와 연결됐다. 영광과 무안을 연결하는 77번 국도 다리 공사가 한창인 향화도항 앞 바다의 닭섬 목도 민닭섬 등은 풍경화의 주인공.

소금기 없는 염전을 달려온 영광의 태양이 겨울바다와 입을 맞추는 순간. 육지를 향한 핏빛 그리움에 불타는 하늘과 불타는 바다 사이에서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던 섬들이 짙은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영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