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민 목사의 시편] 소박함의 깊이

입력 2012-01-31 18:24


깊음은 소박함에 있다. 소박함은 단순하고, 검소하다. 소박함은 자족하는 마음이다. 소박함은 내면의 부요, 정신적 풍요, 그리고 영적인 평강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다. 우리는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를 외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적은 것으로 풍요롭게 살아가는 삶의 기술을 상실해 버렸다. 절제된 쾌락이 주는 참된 기쁨을 상실했다. 진정한 삶의 기술이란 자족하는 기술이요, 적은 것으로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이다.

소박함은 처절한 가난이나 인색함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다. 소박함이란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고, 나눔 속에 진정한 부요를 누리는 삶의 예술이다. 물론 쉬운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행복의 기준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한 삶이다. 소박한 삶을 실천했던 사람들은 깊이 있는 삶,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탐욕에 노예가 된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복을 누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많은 물건을 갖는 것보다 더 적은 욕구를 갖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좀더! 좀더!’는 영혼의 그릇된 외침이다”고 말했다. 세상은 부유함이 행복을 위한 필수 요소이며, 더 부유해질수록 더 큰 행복을 누린다고 믿게끔 우리를 부추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더 행복해 진다고 부추긴다. 그렇지만 인간의 많은 소유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소유한 것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소박한 마음이다. 우리는 고요한 고독 속에서 깊은 영혼의 외침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깊은 영혼의 올바른 외침에 귀를 기울 일 때 소박함을 사랑하게 된다. 성 프랑소와 드 살레는 “매사에 소박함을 사랑하라”고 말했다.

인간의 생존에 위협을 주는 가난은 우리가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만 자족하는 삶, 나눔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심령의 가난은 아름다운 일이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고 말씀하신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진정한 부를 즐기는 그 가난함을 내게 달라”고 말했다. 참된 부요는 자족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할 줄 아는 영혼에 있다. 많이 가졌지만 감사하지 못하고, 나누지 못한다면 그는 참으로 가난한 자다. 반면에 나눌 수 있다면 부요한 자요, 그는 사랑 속에 사는 사람이다. 사랑은 나눔에 있고, 사랑할 때 우리는 부요해진다. 나는 소박함을 십자가에서 배운다. 십자가에서 두 손을 펴신 주님에게서 진정한 자유를 배운다.

(LA새생명비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