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채널 혹은 바람막이?… 판검사 출신 사외이사·임원만 76명

입력 2012-01-30 18:51


대기업들이 고위직 검사와 판사 출신들을 대거 사외이사나 임원으로 영입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전문성 활용이나 윤리경영 강화가 표면적 이유지만 각종 이권을 위한 로비용이나 검찰 수사를 대비한 ‘바람막이’ ‘보험’으로 활용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3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100대 상장기업 사외이사와 임원 중 검사와 판사 등 법조인 출신은 76명으로 집계됐다. 부장검사나 부장판사 이상 고위직 법조인은 47명이다.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 헌법재판관, 고법원장 등 차관급 이상으로 법조계 최고위직 인사만 19명에 달했다.

송정호 전 법무부 장관과 김각영·송광수·이명재 전 검찰총장이 각각 고려아연과 하나금융지주,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의 사외이사로 재직중이다. 신창언·주선회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각각 삼성증권과 CJ제일제당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오세빈·이태운·박송하·김동건 전 서울고법원장은 각각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대우건설, 현대상선 사외이사로 영입됐다. 김상희·문성우·정진호 전 법무부차관과 남기명·한영석 전 법제처장도 각각 LG전자와 GS건설, 한화, LG화학, SK C&C에 사외이사로 몸담고 있다. 검사장과 법원장급에선 12명이 사외이사 직함을 달고 있다.

기업 집행임원에는 젊은 법조인들이 줄줄이 영입됐다. 100대 상장기업의 부장검사와 부장판사급 인사는 모두 16명이다. 이 중에서 김상균 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삼성전자 준법경영실장)와 윤진원 전 서울지검 형사6부장(SK 윤리경영부문장) 등 7명은 대기업 고위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불구속 기소된 지 3주 만에 박철 전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를 SK건설 윤리경영총괄(전무급)로 영입하기도 했다.

기업들은 고위직 출신 법조인들이 수사와 재판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준법경영에 활용하겠다는 취지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이들이 가진 인맥과 영향력을 활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사외이사들은 1년에 10차례 정도 이사회에 참가하는데도 연봉이 많게는 1억원 가까이 되기 때문에 ‘신이 내린 부업’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게다가 이사회에서 사외이사들이 반대를 해 안건이 부결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사외이사들이 ‘거수기’에 불과한 셈이다.

최근 SK그룹 총수일가의 선물투자 의혹 사건이나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담합사건 등이 잇따라 불거졌지만 법조인 출신 사외이사나 임원들은 전혀 막지 못했다. 대주주와 경영진의 횡령, 배임 등에는 눈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들이 검찰 수사나 재판 등에 대비한 보험용으로 법조인 출신을 영입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모 대기업 관계자는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 법원장쯤 거친 사람들은 기업들이 접근할 수 없는 검사나 판사들과 접촉할 수 있는데다, 기업이 수사·재판을 받을 때 한마디만 거들어줘도 엄청난 힘이 되기 때문에 억대 연봉도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지역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후배들에게 신망이 있었던 선배들이 만나자고 하면 거절하기 힘든 게 사실”이라며 “법무부장관이나 검찰총장 등 검사장급 이상 선배는 퇴임 후에도 깍듯이 모시는 문화가 여전하다”고 말했다.

노석철 기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