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에서 들춰낸 낯선 부조리극… 새로운 화법으로 주목받는 황정은 소설 ‘파씨의 입문’
입력 2012-01-26 18:21
새로운 화법으로 평단이 주목하는 소설가 황정은(36·사진)의 두 번째 소설집. 단편 아홉 개가 묶였다.
표제작은 세 살 때 가족들과 함께 바닷가에 가서 단체 사진을 찍기 전, 파도가 오기를 기다리던 기억의 추출물이다. “파씨는 파씨의 시작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 살 무렵이었습니다. 날은 흐리고 바다는 탁하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파씨 이전의 파씨가 어두운 모래 속에 발을 박고 서 있습니다. (중략) 파도를 기다려. 거기서 문득 파씨의 세계가 시작됩니다. 파도, 이 한마디가 파씨의 말랑말랑한 표면을 뚫습니다.”(210쪽)
이후 파씨의 모든 기억은 세 살 때 처음 본, 아니 처음 들은 파도라는 이름으로 함몰된다. 왜냐? 사진을 찍기 위해 바다를 등지고 있었으므로. 파씨의 기억은 유년에서 초등학생, 사춘기, 청년을 거쳐 성인에 이르기까지의 에피소드로 나열되지만 이 모든 게 다시 파도로 환치된다.
“그때 누군가 말합니다. 이번 파도는 너무 작았어, 다음 파도를 기다려. 파씨는 놀랍니다. 바다를 보고 있는 어른들을 올려다봅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했는데 이미 왔다니. 가버렸다니. 바다를 돌아봅니다. 왔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버린 파도, 그냥 가버린 첫 번째 파도의 규모를 생각합니다. 이미 이전과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생각합니다. 파도를 기다립니다.”(227쪽)
소설은 정황에 대한 구구한 설명 없이 간결한 묘사와 생생한 대화만으로 직조된다. 이처럼 특별할 것도 없는 사건을 낯선 부조리극으로 몰고 가는 힘이 황정은 소설의 매력이다. 한밤에 벌어지는 친지들 간의 갈등을 그린 단편 ‘야행’도 이러한 장점을 보여준다. “내가 언제요. 박씨가 말했다. 마음이 짠하다고 했지, 망가졌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게 그거지. 그게 어떻게 그거예요. 그게 어째서 그게 아닌가. 아니, 글쎄, 그걸로 치자면 말입니다, 하고 한씨가 말했다. 제수씨 쪽이 훨씬 예전부터 망가져 있지 않았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17쪽)
소설은 누가 누굴 배신하고 기만했는지에 대한 구체적 상황을 부연하지 않는다. 다만 담담하게 그들의 대화를 전할 뿐이다. 단순해 보이는 이런 대화를 따라 읽다 보면 어떤 묵직한 정서가 느껴진다.
‘옹기전’은 어느 날 소년이 무심코 주워온 항아리가 ‘서쪽에 다섯 개가 있어’라고 말하는 데서 시작한다. 소년은 처음엔 외면하지만 항아리가 점차 사람의 얼굴 형상을 띠어가자 항아리가 말하는 서쪽으로 가보기로 마음먹는다. 그 길에서 그는 항아리를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항아리만 보고 있다가는 사람이 못쓰게 된다’고 말하는 할아버지와, 항아리를 구덩이 속에 파묻는 데 몰두하는 인부들을 만난다.
“너 그거 안 묻을 거냐. 안 묻을 건데요. 도저히? 네. 아무래도? 네. 야 너 그거구나. 그거요? 너 같은 꼬맹이를 뭐라고 하는지 아냐. 남자는 삽을 바닥에서 뽑아내 그걸 끌며 천천히 내 주변을 돌았다. (중략) 나는 달아났다. 그로부터 한참 멀어졌어도 달렸다. 잘각잘각 항아리가 울리고 주머니에 든 동전이 울리고 나침반이 울렸다. 항아리란 어디에도 있다. 내가 주운 것이 최초는 아니고 최후도 아니다.”(101쪽)
소년은 어떤 절벽 앞에 멈추어 섰을 때 항아리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가 거기인 것이다. 이미 당도했으므로 더는 서쪽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냐. 그렇게 물어도 물질인 척, 항아리는 말이 없었다.”(102쪽) 황정은 소설은 우리 시대의 우화이자 풍자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