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온호 귀환] 불확실한 남극의 바다를 떠나 “드디어 육지다”… 선상생활 40일간 체험기

입력 2012-01-25 22:04


드디어 육지다. 25일 정오(현지시간) 아라온호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리틀턴 항구에 천천히 들어섰다. 정복을 차려입은 뉴질랜드 세관 직원들이 배에 올라 연구원, 건설관계자들의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어줬다. 한쪽에선 시커먼 탐지견이 수상한 물건이 없는지 검사하고 다녔다. 이제야 흔들리지 않고 단단한 육지에 도착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난해 12월 17일 러시아 어선 ‘스파르타호’를 구조하기 위해 남극해로 긴급출동한 지 꼬박 40일 만에 리틀턴항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장보고기지 예정지인 남극 테라노바 만까지 직선거리는 3500㎞. 오가는 여정 중에 스파르타호와 한국어선 정우2호 구조를 위해 항해한 거리를 포함하면 40일간 1만여㎞를 항해했다. 이 기간 동안 하루도 아라온호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남극대륙에 상륙한 15일 동안에도 취재를 마치고 나면 매일 헬기를 타고 아라온호로 돌아와야 했다. 망망대해를 달리는 아라온호에서 보낸 날만 25일이었다.

#선상생활, 불확실성과 느림의 미학

극지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배에서는 모든 것이 더뎠다. 어딘가 목적지가 정해지면 전속력으로 달려도 최소한 하루 이상 걸렸다. 아라온호의 최고속력은 16노트로 시속 30㎞가 채 안 된다.

게다가 불확실하기까지 하다. 남극바다 곳곳에 떠 있는 얼음 때문이다. “언제쯤 도착합니까?” 수도 없이 던진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대체로 같다. “가봐야 압니다.”

곳곳에 해빙이 떠 있는 남극바다를 항해할 땐 위성사진과 레이더를 통해 얼음 상태를 예측한 뒤 가급적 얼음이 적을 것으로 짐작되는 항로를 짠다. 막상 가봤는데 얼음이 너무 두꺼우면 돌아가야 하고, 얼음이 넓게 펼쳐져 있으면 속도가 줄어든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도착할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을 못한다.

실제 지난 11일 테라노바 만에서 출발해 ‘정우2호’ 사고 현장에 도착한 건 예정보다 5시간30분이나 앞당겨졌다. 항해 도중 만난 유빙이 예상보다 적었고 약했기 때문이었다. 뭍에서의 생활은 대개 시간 단위로 계획이 이뤄진다. 특히 기자들은 분 단위까지 쪼개가며 일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내일 아니면 모레쯤 도착할걸요”라는 대답을 접할 때마다 매우 낯설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않으면 아라온호에서 적응하기 힘들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

남위 65도 아래도 내려가면 밤이 사라진다. 백야(白夜) 현상이다. 밤 시간에도 해가 중천에 떠 있어 밖이 훤하다. 창밖만 봐선 몇 시인지 도통 가늠할 수 없다.

하늘이 밝으니 언제든 근무가 가능하다. 특히 해양 분야 연구원들은 정해둔 목표점에 도착해야 시추나 설치 등의 작업을 할 수 있다. 필요한 장소에 도착하면 업무 시간이 시작된다. 그게 새벽 2시인지, 낮 2시인지는 중요치 않다.

백야에서 낮밤의 기준은 식사다. 식사가 나오면 낮, 그렇지 않으면 밤이다. 이상범 조리장을 포함해 6명의 조리부 승조원들은 아침 점심 저녁에 야식까지 하루 네 끼를 차려낸다. 메뉴는 한식 중식 양식 등 다양했다. 긴 항해생활을 지루하게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재료 대부분이 냉동식품이었지만 맛은 훌륭했다.

야식은 백야 지대를 항해하는 아라온호에선 필수다. 항해사 등 일부 승조원들의 근무시간은 24시간 교대 체제다. 기관부 승조원들도 스파르타호 수리처럼 일이 생기면 24시간 근무한다. 야식은 밤 근무자들에겐 최고의 친구다.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는 처음엔 신기했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생체리듬이 흐트러지면서 무척 고역이었다. 사람은 자야 하는데 두꺼운 커튼을 쳐도 방은 꽤나 밝아 잠들기 힘들었다. 아라온호 승조원들 중에도 밤낮이 바뀐 이들이 많았다. 침대에 달린 커튼까지 치고 이불을 푹 덮어 써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남극권을 벗어나 뉴질랜드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던 지난 22일부터는 자정이 지나면서 하늘이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밤이 반갑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최첨단 연구선 아라온호

아라온호의 쇄빙능력은 탁월하다. 쿵 소리와 함께 아라온호의 앞을 가로막았던 얼음이 쫙쫙 갈라지는 것을 보면 속이 후련할 정도다. 대한민국 최초의 쇄빙선 아라온호는 1m 두께의 얼음을 3노트(약 시속 5.5㎞)의 속도로 깨고 갈 수 있다. 김예동 남극대륙기지사업단장은 “남극 연구를 하는데 쇄빙선이 없는 것은 신발 없이 밖을 나다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대륙 깊숙한 테라노바 만에 기지를 짓겠다는 발상 역시 아라온호 덕분에 실현 가능한 계획이 됐다.

아라온호의 쇄빙능력은 널리 알려졌지만, 이 배는 단순한 쇄빙선이 아니다. 아라온호에는 50여 가지 첨단 과학장비가 실려 있다. 수백m 바다 아래의 해저지형을 시추할 수 있는 박스 코어, 중력 코어 등의 지질장비와 음파 등을 활용해 해저 지형을 확인할 수 있는 멀티빔, 탄성파 지질탐사기 등 지구물리 장비를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해저지형도 작성, 해저퇴적물 연구 등이 가능하다. 자외선과 오존량 등을 측정할 수 있는 기상장비도 탑재하고 있다. 메인데크 곳곳의 실험실(LAB)에서는 시료 분석 등 각종 연구가 끊임없이 진행된다.

관리해야 할 연구 장비가 많다 보니 아라온호엔 일반 배에선 볼 수 없는 ‘전자부’가 따로 존재한다. 이상영 전자장 등 3명의 전자부원들은 전자공학을 전공한 이 분야 전문가들로 연구 장비 관리 및 연구 지원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이 전자장은 “안전하면서도 연구원들이 최고의 연구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아라온호만의 다른 장점은 DP(Dynamic Positioning)시스템이다. 바다는 바람과 물결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때문에 배를 고정시키려면 자리를 잡고 닻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닻은 수심 80m 이하의 얕은 바다에서나 사용할 수 있다. 통상 2000m나 되는 남극바다에선 무용지물이다.

DP시스템은 바람과 조류를 감안, 4개의 프로펠러를 정교하게 움직여 바다 위에서 한자리에 멈춰 있거나 지정한 루트를 따라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준다. 덕분에 바닷물 채수, 해저 퇴적물 시추 등의 분야에서 정교한 연구작업이 가능하다. 이 기능을 갖춘 쇄빙선은 국제적으로도 드물다.

정교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보니 아라온호를 이용한 공동연구 제의도 많이 들어온다. 아라온호가 국제관계를 매끄럽게 해주는 매개체이자 국가 브랜드를 드높이는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라온호는 26일 리틀턴항에서 장보고기지 정밀조사단원들을 하선시킨 뒤 다음 달 1일 새로운 연구팀을 태우고 약 50일간 남극 아문센 해역 조사에 나선다. 아라온호는 오는 4월 10일 여수항으로 귀환한다.

아라온호(크라이스터처치)=글 김도훈 기자·사진 이동희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