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고향] 안양성결교회 조병창 원로목사

입력 2012-01-25 21:23


고교생때 금식기도 중 응답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고등학교 시절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측)의 서울 성산교회에 다녔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차분하고 조신한 성격의 소년으로 변하고 있었다. 당시 성산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보수주의 신앙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성에 대한 갈급함이 많았다. 목회자에 대한 확실한 소명을 받고 싶은 열망에 금식기도를 드리곤 했다. 금식기도 가운데 들려온 하나님의 특별한 응답이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뜨거운 성령 체험이었다. 비둘기 같은 평화가 나를 감쌌다. 예수를 믿게 된 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노라고 서원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기쁠 뿐이었다. 주저 없이 신학교에 진학했다. 지금의 목회 철학과 방향은 그 시절 교회교육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온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 체험이었다.

안양성결교회에 부임한 지 42년8개월. 지금 교회 안에서는 다정한 원로목사로 통한다. 때론 전국을 누비며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 때론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 크리스천으로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다. 이런 가운데 목회 여정을 정리해 본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내용이 후학들에게 귀감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생과 기독교 입문

태어난 1930년대 중반은 부산과 장춘 간의 직행열차가 개통되고 장진걸 수력 전기 발전 공사가 완료됐으며 청진 비행장이 개장된 즈음이다. 민족적으로는 5개 정당이 합력하여 민족혁명당을 조직하면서 일제 강압에 대한 저항운동이 서서히 활기를 띠는 시점이기도 하다.

경기도 평택 서탄면 내천리는 뒤편으로 나지막한 야산이 펼쳐져 북풍을 막아주었다. 앞에 내천이라는 맑은 도랑이 흐르고 있어 동네 이름이 내천리였는데 100여호의 순창 조씨가 모여 사는 씨족마을이었다.

선친은 농업에 종사했으나 농토가 많지 않아 생활 형편은 어려웠다. 동생이 태어났으나 병고로 세상을 떠나 이내 난 독자 아닌 독자가 됐다.

그러나 부친마저 4살 되던 해 별세해 모친을 따라 외가가 있는 경기도 안양과 용인 수지읍 죽전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앙이 깊은 외할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다. 모태신앙인 셈이다.

출석한 신흥장로교회는 50여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어린 나는 수지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교회 주일학교에 열심히 출석했다. 주일학교 행사 때에는 항상 앞장서며 주역을 맡곤 했다. 교인들 칭찬이 자자했다. 어린 마음에 어깨가 으쓱했다.

주일학교 시절 일본 순사들이 교역자를 연행해 가거나 찬송가를 거침없이 찢어내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럴 때마다 교인들은 이른 새벽 수지초등학교 뒷산에서 모여 합심기도를 드리고 새벽 예배를 드리곤 했다. 어둠이 가시지 않는 미명 속에서 울부짖던 간절한 기도의 목소리들. 신비로운 새벽의 숲과 맞물려 아직까지도 나의 신앙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6·25 전쟁 발발…국군 부상군 구해

신흥장로교회는 백영민 전도인이 담임을 맡고 있었다. 백 전도인은 해수 증세로 늘 힘들어하는 환자였다. 그런 백 전도인을 일본 경찰이 무지막지하게 체포할 때 어린 나는 일제를 향한 분노의 감정이 불일 듯 일어났다. 주먹을 불끈 쥔 어린 나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마 어린 소년의 가슴속에 솟아나는 그 분노는 민족의식에 대한 깨달음의 시작이기도 하였으리라.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어느 날 신봉리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는 국군병사 한 사람이 멍석에 말린 채 방치됐는데, 그 부상병의 신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국군 병사는 가까이 다가서는 내게 “살려 달라”, “배고파 죽겠다”고 소리를 쳐 댔다. 나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보리밥 한 덩이를 그 병사에게 가져다주었다. 그 병사는 그 보리밥 덩어리를 마치 물마시듯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그리고 부상병은 은신처를 찾아 몸을 숨겼다. 그 후에도 나의 보리밥 적선은 한 달여나 계속됐다.

부상병 국군과 상봉, 그리고 서울 신학교 입학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진로 문제로 기도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하나님이 보내셨을까. 어느 날 고등학교 교무실 앞에 군인 지프차가 와서 정차했다. 육군 대령 한 사람이 그 차에서 내렸다. 그가 찾는 사람은 다름 아닌 어릴 적 내가 날라다 준 보리밥 덩이로 연명했던 그 부상당한 국군 병사였다.

최 대령이란 사람. 그의 후의로 나는 최 대령의 서울 홍제동 집에서 대학 2학년 때까지 3년간 유숙하게 됐다. 최 대령 가족의 극진한 보살핌과 사랑 속에서 말이다. 이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그 대학에 입학한 이후 평생 성결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됐으니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사람의 생각과는 다른 것 같다. 하나님 뜻을 따르면 그 길이 바로 평탄한 길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됐다.

안양성결교회 부임과 목회

64년 안양성결교회로 부임했다. 당시 안양성결교회는 30여평의 흙벽돌집에 40여명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교회가 있는 대지는 낮고 뒤에 있던 금성방직의 대지는 높아 장마철만 되면 빗물이 흘러내려 교회는 물바다가 되곤 했다.

물이 차오르는 예배당에서 앉지도 못한 채 서서 예배를 드리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물에 젖곤 하는 흙벽돌의 벽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했다. 그때마다 어린 햇병아리 전도사의 가슴도 함께 무너져 내리곤 했다.

64년 4월 30일 예성 총회에서 드디어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06년 11월 5일까지 42년8개월. 사람의 시각으로 본다면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42여 성상을 한결같이 강단을 지켰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어찌 그 시간들이 평화롭기만 했을까. 때론 밤새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샌 적도 있었다. 답답한 가슴에 퍼런 멍이 들어 “주여, 주여”를 목이 터지게 외친 날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고난은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값진 열매가 맺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이제 이런 고백을 주님께 드릴 수 있다.

“주님이 동행해 주셔서 이제까지 살아왔나이다. 주님을 사랑함이 나의 힘이요 능력이었나이다. 이제 남은 삶도 그리 살게 하소서.”

◆ 조병창 원로목사

1936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다. 목회 50년 동안 신학자를 가르치는 교수로, 주님의 귀한 사역에 헌신을 다한 목회자다. 현재 성결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단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과 성결대학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은퇴 후에는 ‘박년선교회’를 설립해 매월 농어촌지역 목회자에게 도서보내기, 선교헌금 지원 등의 선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현대인의 구원’ 등 10편의 저서가 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