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용우] 잔 다르크들의 전쟁

입력 2012-01-24 17:49


오는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프랑스에서는 후보들 사이의 싸움이 열기를 더해간다. 최근 프랑스 유력 대선 후보들 사이의 공방의 불씨가 600년 전 인물 잔 다르크에게 옮겨붙었다.

마침 지난 6일은 잔 다르크 탄생 600주년이었다. 잔 다르크는 1412년 농부의 딸로 태어나 영국의 손아귀에서 프랑스를 구하고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숨진 백년전쟁의 영웅이다. 오를레앙 전투에서 영국군에 최대의 패배를 안기면서 백척간두의 조국을 기사회생시켰지만, 영국군에 잡혀 화형당한 뒤 한 줌의 재가 되어 센강에 뿌려졌다. 앙드레 말로는 “그대를 기억할 무덤도, 초상화도 없지만 영웅의 진정한 기념비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았던 이여!”라고 칭송했다.

잔 다르크는 좌우를 불문하고 다양한 정파들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잔 다르크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전유물처럼 변했고, 그 전통은 프랑스의 최대 극우파 정당인 민족전선에 계승되었다. 2002년 대통령 결선 투표에서 자크 시라크와 맞붙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장-마리 르펜의 민족전선은 1988년 이후 매년 5월 1일 잔 다르크의 기마상이 있는 파리의 피라미드 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佛 대선 후보들의 치열한 각축

민족전선에 잔 다르크는 국수주의의 표징이다. 지난해 마린 르펜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민족전선의 당수로서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유럽연합, 유로화 반대뿐 아니라 프랑스가 이슬람계 이주민들 때문에 이슬람화(化)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확산시키며 극단적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로 표심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와 딸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린 르펜은 경제 위기를 자양분 삼아 20%가량의 지지율을 보이며 재선을 노리는 현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를 바짝 추격 중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잔 다르크 600회 생일에 맞춰 생가를 방문해 잔 다르크를 민족통합의 상징으로 치켜세웠다. 민족전선의 지지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심산에서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민족통합의 심벌이 프랑스를 분열시키는 세력에 이용돼서는 안 된다고 연일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마린 르펜을 겨냥한 공격임이 분명하다.

이에 질세라 마린 르펜은 잔 다르크를 찬양하며 사르코지를 맞받아쳤다. 1월 7일 피라미드 광장에서 기념식을 열고 사르코지 대통령의 잔 다르크 찬양에는 진정성이 없다며 역공했다.

민족 통합 또는 순혈 민족주의

강도가 다를 뿐 순혈적 민족주의에 기댄 우파와 극우파 대통령 후보들이 15세기 가톨릭 순교자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동안, 녹색당의 여성 후보 에바 졸리는 이슬람과 유대교의 축일도 기존 가톨릭의 축일과 마찬가지로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을 일으켰다.

졸리는 정계와 경제계의 부패를 파헤친 유명 검사 출신이자 노르웨이와 프랑스 두 나라 국적을 가지고 있어 프랑스 역사상 초유의 이중국적 대통령 후보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 프랑스혁명 기념식 때 전통적인 열병식을 민간인들의 행진으로 바꿀 것을 제안해 우파로부터 노르웨이로 돌아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한편에는 순혈적 민족주의를 놓고 다투는 사르코지 대통령과 마린 르펜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다름을 인정하고 약자와 소수자를 포용해 프랑스라는 공동체의 폭을 넓혀 나가려는 졸리가 있다. 이들 중 누가 더 잔 다르크에 가까울까? 잔 다르크가 지금 다시 태어난다면 누구에게 한 표를 던질까? 모를 일이다. 4월 총선을 앞둔 우리들에게 4월 대선을 놓고 벌이는 프랑스 대통령 후보들의 공방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김용우(호모미그란스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