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백석을 찾아서] 명정골 비화… ‘고백’ 한번 못한채 절친한 신현중에게 ‘사랑’ 빼앗겨
입력 2012-01-20 17:12
1936년 4월, 경성 생활을 정리하고 함흥으로 건너간 백석은 이듬해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1937년 4월 7일, 친구 신현중과 박경련이 결혼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신현중은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김준연의 딸과 약혼한 사이였다. 그런데 2년여에 걸친 약혼을 파혼하고 백석이 마음에 두고 있던 박경련과 혼인을 하다니. 백석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38년 4월 이때의 감정을 시로 적었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러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내가 생각하는 것은’ 부분)
이미 자포자기한 사랑일지라도 절친했던 친구가 그 사랑을 대신 꿰차고 혼인을 올렸다는 데 상대적인 비감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박경련의 부친은 그녀가 15세 때 사망하고 어머니 서씨가 외동딸을 키웠다. 수차례에 걸쳐 경남 통영에 내려갔던 백석이지만 박경련의 집 대문을 두드리거나 어머니 서씨를 직접 만나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렇게 된 데는 수줍고 내성적인 백석의 성격과도 관련이 없지 않다. 박경련의 외사촌 오빠 서병직으로부터 백석의 잦은 방문에 대해 전해들은 어머니 서씨는 딸의 장래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평북 태생의 백석보다는 동향 출신에 집안 사정도 익히 알고 있는 신현중에게 딸을 맡기고 싶었을 것이다. 정작 통영 명정골 396번지 대문을 열고 들어간 이는 백석이 아니라 신현중이었다.
통영 출신인 신현중은 박경련 집안과도 잘 아는 처지였다. 1910년 경남 하동군 적량에서 아버지 신상재의 1남3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진주 군청을 거쳐 통영 군청으로 이직한 보통학교 3학년 무렵, 통영으로 건너가 자랐다. 경성제대에 입학한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이 일어나자 격문을 시내 곳곳에 뿌린 혐의로 체포된 그는 3년형을 마치고 출소한 1935년 봄,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로 이름을 날린다.
박경련과 혼인한 그는 1940년 모든 걸 접고 통영으로 귀향한다. 통영에서 그는 요시찰 인물로 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해방 직후 다시 상경해 조선통신사에 들어가 언론인으로 재기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진주로 내려와 진주여중교장을 시작으로 교직 생활을 시작한다. 1950년 통영여중학교 교장, 1952년 통영중학교 교장, 1956년 부산남중학교 교장, 1962년 부산여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경남·부산의 교직을 두루 거치면서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과도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1980년에 영면했다. 고인의 뜻에 따라 통영 미륵산 아래 묻혔다. 198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고, 1993년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2묘역으로 옮겨졌다(박태일 ‘백석과 신현중, 그리고 경남문학’).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