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대륙을 가다] 변화무쌍한 남극의 매력… ‘장보고 기지 예정지’ 자연환경과 친구들
입력 2012-01-20 17:16
“남극은 남극이다.” 남극에서 오랜 시간 지낸 여러 나라 사람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문장이다. 남극에는 오로지 남극에서만 일어나는 일들로 가득하기에 어떤 것도 확신하지 말고, 조심하라는 뜻이 담겼다. 눈과 얼음의 대륙 남극에선 무슨 일들이 벌어지기에 이런 말이 있는 것일까? 오직 남극에서만 겪을 수 있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다.
#변덕스런 날씨
됐다 안됐다 하는 인터넷을 통해 가까스로 본 한국 소식은 ‘한파’. 반면 한여름인 남극은 의외로 따뜻하다. 장보고 기지 예정지의 기온은 0도 안팎을 오르내리고, 구름 없는 날 해가 내리쬐면 영상 5도 정도까지 올라간다. 따뜻한 날씨에 각종 작업으로 몸에 땀이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전신을 감싼 두꺼운 방한외피를 벗어던지기도 한다. “남극으로 피한(避寒)왔다”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다.
하지만 남극은 인간의 방심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해가 쨍쨍해도 바람이 한 번 쏴 불면 체감온도가 뚝 떨어지고 순식간에 차가운 기운이 온 몸에 퍼진다. 게다가 강한 바람은 주변 산, 언덕에 쌓인 눈을 아래로 몰고 내려온다. 그래서 기지 예정지에선 어떤 것도 함부로 땅에 내려놓지 말고 실내에 두라고 한다. 바람을 타고 내려온 눈이 땅을 덮어버리면 아무 것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변덕스런 날씨는 모두를 힘겹게 하지만 특히 스틱스 빙하지대로 떠났던 빙하팀이 무척 고생했다. 빙하팀은 사람 4명과 시추기, 부식 등 짐 3묶음으로 구성됐다. 빙하지대로 출발하는 날, 헬기로 목적지까지 사람을 옮기고 짐 2묶음도 실어 날랐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심하게 끼는 등 날씨가 나빠지는 바람에 헬기 운항에 차질이 생겨 마지막 짐은 목적지로 나르지 못했다. 문제는 마지막 짐에 식량이 들어있었다는 것. 결국 빙하팀은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화이트아웃’ 속 얼음지대에서 3분 떡국, 라면 등으로 5끼니를 때웠다. 식량 짐은 3일째 도착했다.
짓궂은 날씨 속에서도 남극은 자신만의 매력을 살짝 드러낸다. 바람이 잔잔한 날 폭신한 눈밭에 가만히 누워 한없이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삶의 피로가 사라진다. 가끔 바람이 완전히 잦아드는 순간에는 적막이 몸을 감싼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무음의 세상이 펼쳐지는 것. 온통 소음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다.
#귀여운 깜짝 방문
남극에서 지내다 보면 귀여운 손님들의 깜짝 방문이 이어진다.
첫 번째 손님은 남극을 대표하는 펭귄. 펭귄은 전 세계에 17종이 있는데 기지 인근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녀석들은 아델리펭귄이다. 프랑스의 탐험가 뒤몽 뒤르빌이 자신의 부인 이름 아델을 따서 아델리란 이름을 붙였다. 약 50㎝ 정도의 중형펭귄으로 눈 주위가 하얘 다른 펭귄보다 특히 귀엽다. 뒤뚱거리면서 걷는 모양새는 꼭 아기들이 걸음마하는 것 같다.
이들은 호기심이 무척 많다. 무리지어 다니는데 정찰병이 먼저 다가와서 위협이 되는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사람들이 일부러 딴청부리고 있으면 안전하다고 여겨 무리가 우르르 다가온다. 주변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며 잘 놀다가 떠난다. 정박해 있는 아라온호 주변에도 자주 찾아온다. 큰 배를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배가 움직이면 깜짝 놀라며 물속으로 뛰어든다.
독일 곤드와나 기지 주변에선 새끼를 품고 있는 어미 펭귄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낯선 존재의 접근을 경계하면서도 새끼가 놀랄까 자리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다. 새끼 펭귄은 놀랍게도 어미 펭귄의 울음소리를 정확히 기억한다.
해빙 곳곳에 뚫린 구멍으로는 해표들이 찾아온다.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선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푸 푸 소리를 내며 심호흡을 한다.
기지 주변에 가장 많이 나타난 녀석은 웨들해표다. 착한 표정이 특징으로 사람을 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400㎏에 달하는 육중한 몸통을 꿈틀거리면서 얼음 위로 올라온 뒤 느긋하게 배를 내밀고 누워 일광욕을 즐긴다. 다만 가는 앞길을 정면에서 막으면 날카로운 삼각형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니 혹시라도 만난다면 조심할 것!
귀여운 동물 손님의 깜짝 방문은 작업과 연구의 능률을 올려준다. 추위 속 힘든 작업 도중이라도 이들이 나타나면 다들 잠시 일손을 잠시 멈춘 채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문명세계의 동물원에서도 귀여운 펭귄, 해표는 인기스타다. 하물며 진짜 남극에서 이들을 만났는데 어찌 기념사진 한 장 안 남길 수 있겠는가.
#사이좋은 이웃사촌
극한 환경과 문명세계와 머나먼 거리, 그렇기에 남극에 머무는 사람들은 고립감을 강하게 느낀다. 이곳에서 이웃은 매우 반가운 존재다. 인종과 국적, 언어를 따지지 않고 매우 격의 없이 지낸다.
장보고 기지의 이웃은 직선거리 8㎞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탈리아 ‘마리오 주켈리 기지’다. 1987년 들어선 기지로 10월부터 2월까지 하계 기지로 운영된다. 이곳에서 연구도 하지만 주로 이탈리아, 프랑스가 공동운영하는 내륙 콩코르디아 기지의 보급기지로 활용된다. 현재 60명이 머물고 있는데 다음달이면 모두 철수한다.
이탈리아 기지엔 이탈리아 국기 옆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환영 인사다. 기지 대원들도 처음 보는 동양인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이곳은 20년이 넘은 탓에 다소 낡았지만 대신 아늑하다. 대원들은 진한 에스프레소와 피자,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따뜻한 지중해의 고향을 떠올린다. AS로마, 라치오 등 이탈리아 축구팀들의 휘장도 걸려있다. 축구에 열광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열정은 남극이라고 다르지 않다.
오고 가는 도움 속에 정이 싹튼다. 아라온호는 이탈리아 기지에서 먹을 음식 등을 실어와 전달했고 아라온호 선의(船醫)는 이탈리아 기지에서 근무하는 연구원 세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줬다. 우리 연구원 중 일부는 아라온호가 남극을 떠난 뒤에도 이탈리아 기지에 머물면서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기지 전반을 총괄 관리하는 리카르도 보노는 “장보고 기지가 들어서게 돼 매우 기쁘다. 양국 기지가 협동해서 더 좋은 연구결과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 떨어진 곳에 있는 독일 곤드와나 기지는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갈 수 있다. 이곳은 독일 지질연구소에서 운영하는 하계 캠프로 2년마다 연구원들이 찾아온다. 올해는 연구원들이 방문하는 해인데 20일 현재 도착하지 않았다. 연구원이 없을 때에도 조난객이 쉼터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임시 대피소의 문은 열어둔다. 간이침대 5개가 있고 물, 책 등이 비치돼 있다.
#곳곳에 도사린 위험
기지 주변은 남극 대륙에서 매우 안전한 지역에 속하지만 위협 요소는 존재한다.
크레바스는 가히 공포의 대상이다. 얼음이 갈라져서 생긴 틈을 뜻하는 크레바스의 깊이는 수m에서 100m 이상까지 다양하다. 큰 크레바스는 사람은 물론 설상차 같은 이동장비도 삼킨다. 특히 눈에 살짝 덮여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는 남극의 최대 위험요소다. 기지 예정지는 해안가에 가까운 곳인 덕분에 사람이 빠질 정도로 큰 크레바스는 없지만 작은 크레바스는 존재한다. 하얀 얼음층은 내려갈수록 검푸른 빛을 내뿜고, 그 아래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틈이 보인다.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왜 크레바스를 ‘악마의 이빨’이라 부르는지 절로 알 수 있다.
바다, 육지를 덮고 있는 얼음도 위험하다. 꽝꽝 언 얼음은 괜찮지만 군데군데 얇은 얼음을 잘못 밟았다간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실제로 해빙 위 다이버를 취재하던 중 기자가 밟은 얼음이 깨지면서 오른발이 얼음 바다 속으로 쑥 들어갔다.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빼냈지만 이미 오른발은 남극의 바닷물에 푹 젖었다. 그 정도였으니 다행이지 돌이켜보면 무척 아찔한 순간이었다.
얼음에 안 빠지려면 드러난 흙 땅을 밟으면 된다. 하지만 드러난 육지에도 위협요소가 있으니 바로 남극 도둑갈매기(스쿠아)다. 남극 최고의 포식자임에도 불구하고 회색빛이 감도는 누런 땅과 비슷한 보호색을 갖고 있다. 이는 다른 스쿠아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다. 스쿠아는 먹이가 떨어지면 다른 스쿠아를 잡아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꺅꺅거리는 비명 소리와 함께 공격을 받으면 그제야 영역을 침범했음을 알게 된다.
사실 남극에서 이정도 위협은 약과다. 남극에는 해가 뜨지 않는 긴 겨울과 영하 89.2도(관측 최저온도)까지 떨어지는 극한의 추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곳에선 기후변화 등 인류의 미래를 예견하는 연구가 가능하다. 그래서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인류의 남극 도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남극 테라노바 만=글 김도훈 기자, 사진 이동희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