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설

입력 2012-01-20 17:08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된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재집권한 김홍집 내각은 태양력 도입과 종두법 실시 등 개화 조치들을 단행했다. 을미개혁이다. 음력이던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환산한 뒤 이날부터 독자적인 연호 건양(建陽)을 사용토록 하는 칙명을 발표했다. 첫 양력 원단(元旦)에 김홍집은 고종을 모시고 주다례를 거행하고 각국 공사들을 접견하는 신년하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은 큰 반발에 부딪쳤다. 명성황후 시해로 가뜩이나 격앙돼있던 민중들의 불만은 상투 자르기를 강요하는 단발령으로 폭발해 대대적인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때부터 양력설은 ‘왜놈 설’, 이를 쇠는 것은 친일로 치부됐고 음력설인 설날을 지키는 것은 독립운동에 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해방 이후 자유당 정권이 1949년 신정을 공휴일로 정해 음력설을 억제하려 했고, 박정희 정권도 이중과세의 폐단을 내세워 음력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전두환 정권 때인 1985년 설날은 ‘민속의 날’로 지정돼 하루 휴무일이 됐고 1989년 3일간의 휴가와 함께 설이라는 이름이 87년 만에 복권됐다.

중국 역사서 ‘수서(隋書)’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연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책력이 존재하는 한 새해 첫날은 있게 마련인 만큼 설에 의미를 부여해 명절로 쇠는 풍습은 삼국시대 이전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떡국을 먹는 풍속도 조선 후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백탕(白湯)’ 혹은 ‘병탕(餠湯)’을 끓여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는 떡국을 먹는 풍속이 상고시대 신년 제사 때 음복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좋은 세시풍습이 점점 자취를 감추는 것은 안타깝다. 양력이 대세를 이루다보니 섣달 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며 근신하는 마음으로 설을 맞던 수세(守歲)의 의미가 거의 퇴색했다. 섣달 그믐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를 팔러 다니던 아이들이 없어졌고 값을 깎지도 않고 이를 사주던 넉넉한 풍경도 거의 사라졌다. 이번 설에는 어렵게 되찾은 설과 잊혀져 가는 우리 것들을 되돌아봐도 좋을 것이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