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해 남긴 따스한 온기 한줌… 김지윤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

입력 2012-01-19 18:05


“불을 발명했다는 중국 황제 수인씨의 이름을 딴 수인반점에서 점심을 먹는다./ 한국에 온 후 칠 년 동안 이 식당에서 내내 주방장을 했다는 왕선생,/ 그의 손끝에서 불꽃이 떨어진다. 냄비마다 타오르는 불꽃은 봉화(烽火)./ (중략)/ 무심히 밥을 먹는 손님들은 그릇 속의 탕수육 깐풍기 칠리새우를 튀겨낸 불꽃이/ 왕선생이 보낸 신호인지도 모르고 바삐 식사만 하는데,/ 옛 고향 앞뜰에서 설날에 놀던 폭죽의 그 불꽃, 지금 왕선생 냄비에 와 붙는다.”(‘수인반점 왕선생’ 부분)

중국 황제 수인씨는 불을 발명했다는 전설 속 인물이다.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시인 김지윤(32·사진)은 그의 이름을 딴 수인반점에서 점심을 먹으며 ‘불’의 은유를 주방장 왕선생 삶의 내력으로 옮겨간다. 왕선생이 7년 동안 프라이팬을 잡으며 피워 올린 불꽃은 그의 고향을 향해 소식을 전하는 봉화라는 신호인 것이다. 생활이란 사소한 잘못에도 얼마나 쉽게 열탕이나 냉탕에 빠지기 쉬운 괴상망측한 감정의 골짜기이던가. 그러나 김지윤은 그런 열기도 냉기도 아닌 그만의 온기로 타인의 사연을 따스하게 품고 있다.

첫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문학사상사)엔 그런 온기로 세상을 감싸는 시편이 여럿이다. “시장 보고 돌아오는 길/ 느릿느릿 버스는 아다지오 더딘 걸음이다/ 퇴근길 콩나물 버스 속 부비고 선 사람들 닮은 꼴로/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장바구니 속 저녁 찬거리들/ 더듬어 쥔 손잡이엔 낯선 온기가 내 손을 맞잡는다/ (중략)/ 장바구니 속에선 두부 미나리 브로커리 감자들이 제 몸으로/ 달걀 한 판을 감싸안아 힘껏 버티고 있고/ 나는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손잡이에 따스한 내력을 남긴다”(‘달걀 한 판’ 부분)

흔들리는 만원 버스 안에서 내 장바구니에 든 달걀이 깨질까봐 걱정만 하다 문득 남의 바구니 생각은 못한 채 살아온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다. 그런 반성적 사유는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손잡이에 따스한 내력을 남기는” 마음으로 확장돼 간다.

젊은 나이임에도 삶의 이편 저편을 열심히 뒤집어보며 그 출처를 더듬어 가는 손길이 정밀하고 믿음직하다. 6년을 기다려 낸 이 시집이야말로 다음 시집을 위한 봉화(烽火)일 터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