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4) 정치 권력과 문화 권력

입력 2012-01-19 18:33


예수님 시대 이전 유대인은 왜 인간권력에 핍박 받아야했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곳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그들이 땅과 하늘과 물 속에 있는 모든 생물을 가꾸며 하나님과 함께 살자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또 사람과 모든 생물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생활과 생존의 방식은 오직 ‘사랑’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호기심이 그 마음을 격동하여 하나님의 품을 떠나게 되자 사람은 곧 고통 속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사랑 대신 폭력이 들어섰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폭력의 결과로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여 홍수의 큰 심판을 거쳤으나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의 쟁탈전은 계속되었다. 함의 자손 니므롯은 사냥하는 무기로 권력을 잡고 셈의 통치권을 전복했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창 10:10)

니므롯의 고대 바벨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앗수르, 후기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등 제국의 권력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권세를 업고 세상을 다스리던 장자권의 시대는 무너지고 권력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새 권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바벨론의 나부, 페르시아의 수쉬낙, 헬라의 제우스가 모두 그런 신들이었다. 이들 신화는 대부분 가나안 사람들이 만든 엘과 아세라의 신화를 모방해서 만들어졌다.

새로 만들어진 신들과 정치 권력이 야합하고 있을 때 그런 것들을 외면하며 합리적인 인간의 길을 찾아나선 인물들이 철학자와 수학자들이었다. 이미 고대 바벨론이나 애굽에도 권력의 시종으로 인내하며 살아온 박사들과 술사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자부심을 일깨워준 스승이 바로 논리학을 개척하고 가르친 탈레스(BC 624∼547)였다. 그는 천문학적 지식으로 일식을 예언하고, 막대기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탈레스의 논리학에서 철학과 수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철학 쪽에서 뛰어난 인물은 소크라테스(BC 470∼399)였다. 수학 쪽에서는 피타고라스(BC 582∼497)가 유명했으나 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한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그는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영혼의 문제를 수학적으로 풀겠다며 윤회설을 주장하고 밀교의 교단을 만들었다. 그는 또 유대 카발라의 수비학을 도입하여 숫자로 운명을 푼다며 수비학으로 민중을지배하려 했다.

“그가 조직했던 집단은 철학의 일파였고 동시에 정당이었으며, 또한 민중에 대해 격렬하게 대항하는 종교 단체이기도 했다.”(안재구 ‘수학문화사’)

결국 고향 사모아를 떠난 그는 이탈리아의 크로토네에서 다시 민중을 지배하려다가 그들의 반격을 받고 도망쳐 메타폰투스의 한 수녀원에서 자살했다. 그는 죽었으나 그 후로도 민중을 지배하려는 수학자들과 마술사들과 연금술사들에게 그는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수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인간 생활에 유익을 주는 실용수학을 연구했다. 그들이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BC 287∼212), 원추곡선론을 정립한 페르게의 아폴로니오스(BC 262∼200) 등이었다.

아폴로니오스와 같은 이름을 가진 티아나 출신의 아폴로니오스가 있다. 그는 피타고라스의 밀교 사상을 이어받아 수비학과 마술로 민중을 지배하려 했다. 그는 12명의 핵심 제자와 72명의 제자단을 두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 메시아가 되려 했다. 철학 쪽에서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물려받은 사람은 플라톤(BC 427∼347)이었다. 개성을 무시한 교육 제도로 인간을 계급화한 그의 저서 ‘레푸블리카’의 ‘공화국’이란 말은 오늘날에도 모든 정권들이 즐겨 사용한다.

“게마트리아를 모르는 자는 여기 들어오지 말라.”

플라톤이 아테네 근교에 그가 설립한 ‘아카데미아’의 정문에 써 놓은 말이다. 사람들이 게마트리아를 수학으로 번역하나 실은 ‘수학의 신’ 즉 피타고라스가 만들어낸 독재적 지배신을 뜻하는 말이다. 피타고라스의 게마트리아는 또한 속임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가 발견했다는 소위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고대로부터 있었던 직각의 작도법을 자기가 만들어낸 것처럼 발표했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수는 프림톤 322라고 불리는 바빌로니아의 쐐기 문자 석판에도 이미 나타나 있다.”(마리오 리비오 ‘신은 수학자인가’)

신비주의적 이론 수학에 맞선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생겨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Ⅰ세가 설립한 학문의 전당 ‘무제이온’ 때문이었다. 20세에 마케도니아 왕이 되어 헬라스 연맹의 맹주가 된 알렉산더는 삽시간에 애굽에서 인도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 70개를 건설했다. 그가 33세에 열병으로 사망하자(BC 323) 그의 영토를 네 명의 막료 장군들이 분할 통치했는데 애굽을 통치한 자가 프톨레마이오스 Ⅰ세였던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Ⅰ세는 BC 284년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무제이온과 도서관을 설립했다. 그가 전세계에서 모아들인 도서는 50만권에 이르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학문의 도시로 길러 이를 문화 권력의 중심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또 그는 애굽와 헬라의 신화를 연결시키는 새로운 신 ‘세라피스’의 신전을 건립하여 제2도서관을 설립하고 이를 문화 권력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은 로마 제국의 등장으로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BC 51년 프톨레마이오스 세가 죽자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 Ⅶ세와 그녀의 남동생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들 사이를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애굽에 들어갔으나 클레오파트라의 편이 되었고 로마군은 남동생의 군대를 공격했다. 전투 중에 무제이온에 화재가 일어나 50만권의 도서가 거의 다 소실되었고, 이 후로 로마군은 학문의 파괴자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여전히 알렉산드리아는 문화 권력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다시 로마 쪽의 변화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옥타비아누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있었고, 다시 티베리우스 황제가 AD 37년 사망하자 그의 종손 카이우스가 황위 계승에 성공했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곧 자신의 친구 헤롯 아그립바를 유대로 보내 그 숙부이며 매부인 헤롯 안디바의 자리를 차지하여 유대 왕이 되도록 하고 전무후무한 폭정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자처하면서 백성들에게 경배할 것을 강요하였다.”(‘유대고대사’ 19-1)

그는 모든 속주의 신전에 자신의 상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이에 반기를 든 세력이 바로 유대인들이었다. 계속되는 강대국의 침략으로 고국을 떠난 유대인들은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특히 BC 586년 바벨론군에 의해 유대가 멸망할 때 선지자 예레미야를 비롯해 많은 유대인들이 고국을 떠나 애굽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들이 나중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리신 그 계명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들이 애굽에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굽 사람들이 자기네 신들을 섬기거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헬라와 애굽의 전통을 절충하는 세라피스 신전을 세울 때도 유대인들은 그것이 자기네 신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므로 방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우스 황제가 자신의 신상을 속주의 모든 도시에 세우고 경배하도록 내린 명령은 유대인들에게 자살 명령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애마를 집정관으로 임명하고 대리석 마굿간에 보랏빛 양탄자를 깔게 했다.”(모우지즈 해더스 ‘로마 제국’)

그 외에도 알렉산드리아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애굽은 큰 농업 국가이고 알렉산드리아는 그 농산물의 집산지였다. 지중해 연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의 유통이 알렉산드리아의 곡물 거래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곡물의 거래는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온 유대인들의 손에 장악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지중해를 지배하게 된 이후로 헬라인들이 대거 알렉산드리아로 흘러들어 오면서 농산물과 곡물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