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성기철] 국민경선으로 공천한다는데…

입력 2012-01-18 18:32


“현역 의원에 유리한 제도빛 좋은 개살구 안 되도록 철저한 대비를”

L씨는 2000년 1월 창당된 새천년민주당에 정통관료 영입 케이스로 입당했다. 새천년민주당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16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를 리모델링한 정당이다.

L씨와 점심식사를 하면서 나눈 얘기가 12년이 지난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고향에서 출마하실 거죠?” “글쎄, 입당 제의를 받고 나에 대한 지명도 여론조사를 해 봤는데 4%밖에 안 나와요. 지지도도 아니고 지명도가 그 정도인데 어떻게 출마하겠어요? 비례대표를 생각해 봐야지요.” “비례대표도 쉽지 않을 텐데요.”

L씨는 명문 고교와 대학을 나와 행정고시에 합격해 청와대 비서관과 주요 부처 차관까지 지낸 자신을 고향 사람들이 몰라주는 데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다. 그래도 선거구가 취약지역인 관계로 경쟁자 없이 공천을 받을 수는 있었다. 결과는 참패였다. 정치 신인이 지명도를 확보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말해준다. ‘대형사고’를 치지 않고서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데 한계가 있다. L씨는 그 뒤 장관을 지내고 나서야 고향이 아닌 서울에서 출마해 금배지를 달았다.

새삼스레 L씨 얘기가 떠오른 것은 총선을 앞둔 여야가 이구동성으로 지역구 공천에 개방형 국민경선제를 도입하겠다고 해서다. 국민경선을 통해 공천하면 신인들의 정치권 진입이 더 어려워질 것이란 걱정이 들어서다.

한나라당은 전체 245개 지역구의 80%인 196곳에서 국민경선을 실시할 계획이란다. 선거인단에서 일반유권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80%로 정했다. 민주통합당의 경우 구체안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명숙 대표가 공천혁명을 부르짖으며 “완전국민경선을 통해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고 공언한다. 어느새 국민경선이 거스르기 힘든 대세가 돼 버린 느낌이다.

문제는 정치권 물갈이 여론이 높고, 여야가 이를 받아들여 현역의원을 많이 교체하겠다고 하지만 국민경선을 실시할 경우 그 뜻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국민경선제는 현역 의원한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평균적으로 볼 때 신인에 비해 지명도가 높은 것은 당연하고, 선거인단 규모를 현재 거론되는 것처럼 2000∼3000명 정도로 할 경우 현역 의원이 오랫동안 공들인 조직을 가동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들 공산이 크다. 조직적인 동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선거인단을 수만 명 규모로 늘릴 수는 없지 않은가. 한나라당은 현역이 나설 경우 신인과 1대 1 양자구도를 만들어 준다지만 신인의 지명도가 아주 높은 사람이 아닌 한 어렵긴 매한가지일 것이다.

여야가 전국적으로 이런 식의 경선을 실시할 경우 선거인단 동원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금품이 오갈 가능성이 있다. 금배지를 달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는 않는 우리 정치 문화를 감안하면 2000∼3000명 정도는 매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전혀 없지 않을 것이다. 기우에 그치면 좋겠지만 여기저기서 ‘돈 선거’가 불거질 경우 정말 낭패다. 중앙선관위와 정부의 총선 관리 자체가 일대 혼란에 빠지지 말란 법이 없다.

역선택 문제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선거인단에 반대 측 정당 지지자들이 대거 들어가 약체 후보에게 표를 던질 가능성이 그것이다. 여야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협상을 벌이기로 했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한나라당은 여야가 같은 날 경선을 치르는 방안에 비중을 두고 있는 반면, 민주통합당은 모바일투표 도입에 더 관심이다. 역선택 방지대책을 확실하게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경선을 치르는 건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국민에게 공천권을 부여하는 게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국민의 이익을 위해 책임 있는 정치적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하는 자발적 조직’(정당법 제2조)인 정당이 왜 소신껏 공천도 하지 못한단 말인가. 국민경선제 역시 일종의 포퓰리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 아무튼 국민경선제가 빛 좋은 개살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기철 편집국 부국장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