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은미희의 마실] 우리가 먼저
입력 2012-01-18 20:59
요즘 들어 우리 사회가 고약스럽게 변해간다는 생각이 든다. 들려오는 소식들마다 어째 밝고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우울하고 걱정스러운 소리들뿐이다. 콩 한쪽도 나눠먹고 어른들을 공경해마지 않던 옛날의 인정과 예절은 사라진 지 오래다. 게다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는데,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존경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려워하기만 해도 좋으련만, 그것 역시 마음 같지 않다.
한강 기적뒤엔 잃은것 많아
한강의 기적이라며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하는 동안 우리는 정작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지키고 보존하고 물려줘야할 가치마저도 우리는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교양의 조건으로 서구의 에티켓을 공부하고, 미풍양속들은 낡고 비효율적인 것이라며 이 또한 폐기처분할 목록에 추가하면서 우리의 풍경도 달라졌다. 성공을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앞만 보고 내달리느라 미처 옆을 돌아보고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를 잃어버렸다. 정말, 우리 것은 무조건 촌스럽고 낡았다며 바꾸기를 강요하던 때가 있었다. 지난 1960∼70년대 시절, 제주도의 돌담들이 가난의 상징이라며 부숴버릴 것을 강요했고, 초가집 역시 그 패러다임을 비껴가지 못했다. 옹기종기, 뒷산이나 앞산과 조화를 이루며 낮게 엎드려있던 초가집들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돌담들은 시멘트로 처발라져 저 혼자 고립됐다.
어디 그뿐일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다른 나라에서는 물을 사먹는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우리 반 아이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그렇게 고약한 인심이 어디 있을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생면부지의 사람일지라도 목이 말라 물을 청하면 흔쾌히 물바가지를 내밀곤 했었다. 헌데 지금은 우리 역시 물을 사 먹어야 하고,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모른 척 피해가기 일쑤다.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더 걱정스러운 일은 나이 어린 친구들의 문자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 올라온 십대들의 단어를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금사빠’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십장생’은 ‘십대 때부터 장래를 생각해야 된다’는 말이란다. 또 ‘갈비’는 ‘갈수록 비호감’이라는 뜻이란다. 이렇게 세대 간의 언어마저 다르니, 어찌 소통이 될 수 있고, 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가만히 우리나라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부글부글 끓는 가마솥 안을 보는 듯하다. 십대는 공부에 대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이십대는 취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삼십대는 취업과 결혼에 대한 불안으로, 사십대는 명퇴에 대한 걱정으로, 오십대는 노후에 대한 공포로, 육십대는 젊은 세대들에 대한 서운함과 현재에 대한 실망으로, 하루하루가 불만이고 고통스럽다. 그렇게 다들 편안하지가 않다, 헌데 더 걱정스러운 일은 어디를 둘러봐도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는데, 지금이 난세인지 그 또한 알 수 없다. 구구절절 어렵다고 읊고있는 내 걱정들이 지나친 기우가 아닌가하는 의문도 살짝 든다. 말이 길었다. 무언가 자꾸 중언부언하고 있는 것이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가보다.
내것 먼저 손해보는 여유를
어쨌거나 이 혼돈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놓치지 않으려면 여유있는 마음을 지니는 것일 게다. 그 속에서 더불어 사는 지혜를 찾아내고 함께 가는 법을 찾아야 한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내 것 하나를 손해 볼 줄 아는, 그런 지혜와 너그러움 말이다.
그러니 한 가지 제안하건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기독교인부터가, 바로 서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먼저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진정한 이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타는 결국 자신을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한다. 그러니 남에게 강요하기 이전에 우리 기독교인들부터 먼저,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손을 내밀어보자. 바로 나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