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절경 편백나무숲 숨결까지 맑아지는 치유의 숲… ‘전남 장성 나들이’

입력 2012-01-18 10:14


노령산맥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긴 성처럼 보이는 전남 장성을 ‘문불여’의 고장이라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조선팔도에 ‘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고 말하면서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됐다. 그 문향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석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석은 황룡면 금호리 야산에서 450여 년째 홀로 쓸쓸하게 무덤을 지키고 있는 백비(白碑). 비석에 아무런 내용도 새겨지지 않은 백비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청백리로 장성이 고향인 아곡 박수량(1491∼1554) 선생.

호남의 대표적 유림인 하서 김인후(1510∼1560) 선생을 배향한 필암서원에서 축령산휴양림 가는 길에 위치한 박수량 선생의 묘는 필부의 무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덤에 오르는 눈 덮인 계단은 최근 공직자 청렴교육의 현장으로 인기를 끌면서 찾는 사람이 많아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조각으로 멋을 낸 비석도 아니요 값비싼 석재로 만든 비석도 아닌 백비가 유명세를 탄 데는 주인의 청렴결백한 삶이 너무나 파란만장했기 때문이다. 박수량 선생은 25세 때 과거에 급제해 나주목사, 한성판윤, 호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지만 워낙 청빈해 한 달에 절반은 부엌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임종을 앞둔 박수량 선생은 고향 땅에 묻되 묘도 크게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집안에는 한양에서 장성으로 갈 운상비조차 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명종은 서해바다의 돌을 골라 하사하며 “박수량의 청백을 알면서 빗돌에다 새삼스럽게 그의 청백했던 생활상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 모르니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고 명했다고 한다. 공직자들이 하얀 백비 앞에서 가슴을 씻는 이유다.

장성에는 세상에 하나 뿐인 가장 아름다운 숲도 있다. 장성군과 고창군의 경계에 우뚝 솟은 축령산(621m)의 동쪽자락에 형성된 80여만 평 넓이의 축령산휴양림이 그곳. 축령산휴양림은 육림가 춘원 임종국(1915∼1987) 선생이 1956년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해 지금은 수령이 50년 가까이 되는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축령산휴양림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지만 편백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순백의 세상을 연출하는 겨울만큼 황홀하지는 않다. 밤새 소복소복 내린 눈이 아름드리 편백나무 가지에 솜사탕처럼 쌓이면 부지런한 연인들이 이른 아침 아무도 찾지 않은 편백나무 숲 산책로에 다정스럽게 발자국을 남긴다. 눈구름이 지나간 푸른 하늘에서 아침햇살이 쏟아지자 눈부시도록 하얀 눈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상큼한 피톤치드는 온몸을 감싼다.

임종국 선생이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은 까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화된 산림을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멀쩡한 나무도 베어내 땔감으로 사용하던 시절에 산에 나무를 심는 임종국 선생은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임종국 선생은 가산을 처분해 서삼면 모암리와 북하면 월성리의 임야를 매입한 후 254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가꾸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사상 유례없는 가뭄으로 나무들이 말라 죽기 시작했다. 그와 가족은 한 그루의 나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물지게를 지고 한밤까지 산길을 수없이 오르락내리락 했다고 한다. 보다 못한 인근 주민들이 야간에 횃불을 들고 나와 도와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임종국 선생은 임야관리인을 고용하고 임도를 개설하면서 남아 있던 전답을 모두 처분하고도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홍수로 묘포장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결국 한평생 조림을 하고도 빚쟁이로 전락한 임종국 선생은 말년을 쓸쓸하게 보내다 타계하고 명품숲으로 성장한 편백나무숲은 벌채 위기에 처한다.

보다 못한 산림청이 여론을 등에 업고 소유주들을 설득해 2002년 편백나무숲을 매입해 ‘치유의 숲’으로 조성하고 있다. 고향 순창에 묻혔던 임종국 선생은 2001년 경기도 포천 국립수목원의 ‘숲의 명예전당’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뼈는 수목장을 통해 평생을 바쳐 조림한 편백나무의 거름이 됐다.

은세계로 변한 축령산휴양림은 8.5㎞에 이르는 임도를 중심으로 솔내음숲길(2.2㎞), 산소숲길(1.9㎞), 건강숲길(2.9㎞), 하늘숲길(2.7㎞) 등이 거미줄처럼 18.2㎞나 뻗어 있다. 임도는 추암마을, 대덕마을, 금곡마을, 모암마을과 연결돼 사방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숲길은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저마다의 개성이 듬뿍 묻어난다. 그 중에서도 축령산 정상이 보이는 숲내음숲길은 전봇대처럼 쭉쭉 뻗은 편백나무 사이로 산책로가 S자를 그려 더욱 운치가 있다. 산새들이 조잘거리는 흑백사진 속을 걷다 보면 느닷없이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떨어져 은가루처럼 흩날리는 모습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임도와 연결된 4개 마을 중 금곡영화마을은 50∼60년대의 마을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산촌. 돌담이 멋스런 금곡마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장성이 고향인 임권택 감독이 이 마을을 배경으로 영화 ‘태백산맥’을 촬영하면서부터. 이어 이영재 감독의 ‘내 마음의 풍금’을 비롯해 김수향 감독의 ‘침향’, 김종진 감독의 ‘만남의 광장’, TV드라마 ‘왕초’ 등이 잇달아 촬영되면서 영화마을이란 칭호를 얻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겨울이 되면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리던 초가지붕이 최근 기와지붕으로 바뀌고 마을길이 포장돼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 하지만 ‘내 마음의 풍금’에서 전도연이 짝사랑하는 선생님의 가정방문을 받고 수줍어하던 돌담집 등은 그대로 남아 있어 고향마을을 찾은 것처럼 반갑다.

장성=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