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 빌미 유가 올리기… 사우디, 이란 덕에 나팔 부나

입력 2012-01-17 18:31
구세주인가, 탐욕스런 압둘라인가.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서방국가들의 이란 석유금수 제재 압박으로 세계 각국에 원유수급 비상이 걸린 가운데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감소분을 메우겠다고 총대를 메고 나섰다. 그러나 사우디는 사실상 가격 조절을 통해 자국의 오일머니를 늘리겠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어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한국 등은 사우디가 부르는 값에 울며 겨자 먹기로 원유를 사야 할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사우디, 이란 사태시 하루 200만 배럴 증산 ‘장담’=알리 알-나이미 사우디 석유장관은 16일(현지시간) CNN방송 인터뷰에서 사우디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 “거의 즉시” 하루 200만 배럴 가량 석유생산을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사우디의 이런 입장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따라 걸프 주변국들이 수입국에 석유수출을 늘릴 경우 가만두지 않겠다고 강경입장을 표명한 가운데 나온 반응이어서 주목된다. 또 국제 에너지기구(IEA)가 현재 증산 여력이 있다는 국가로 사우디를 지목한 것과 때맞춰 나왔다.

나이미 장관은 “현재 충분한 여유를 두고 하루 940만∼980만 배럴 가량을 생산하고 있다”면서 “따라서 하루 1250만 배럴까지 생산할 수 있는 충분한 잉여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자신은 사우디가 상황 발생시 생산량을 수일 안에 1140만∼1180만 배럴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이미는 이어 “이 같은 여분의 생산능력은 전 세계적인 비상사태와 고객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란사태로 곳간 채우려는 압둘라=나이미 장관의 발언을 여기까지만 들을 경우 사우디는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등 석유 수입선 다변화에 목말라하는 국가들에게 구세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얘기하는 가격 조건을 추가하면 뉘앙스가 확 달라진다.

나이미 장관은 “우리의 희망과 바람은 석유 가격을 안정시키는 것”이라면서 바람직한 가격이 배럴당 평균 100달러 가량이라고 말했다. 그는 100달러면 세계 경제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희망가격은 2008년 11월 그가 ‘공정한 가격(fair price)’라고 주장했던 배럴당 75달러 수준보다 3분의 1이나 높은 것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우디가 석유가격과 관련해 전통적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가운데 온건한 입장을 취해 온 것에 비하면 이번 ‘희망가격’은 베네수엘라 같은 강경 국가들이 주장하는 가격과 비슷한 선상에 있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다른 OPEC 회원국들도 100달러 선을 합당한 가격이라고 맞장구를 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가격은 국제통화기금(IMF)이 사우디 정부의 재정균형을 맞추기 위한 올해 석유값을 배럴당 80달러 선으로 추산한 것보다 20달러나 높다.

사우디가 이처럼 향후 석유가격 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할 희망가격을 높게 제시한 데 대해 코메르츠뱅크의 석유분석가 카스텐 프리치는 ‘아랍의 봄’ 확산을 잠재우기 위해 사우디 정부가 자국민에게 지불할 돈이 석유가격에 포함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압둘라 국왕은 지난해 자국민을 달래기 위한 포퓰리즘정책 예산으로 1290억 달러를 책정했으나 민주화 운동가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는 것. 리야드에 본부를 둔 투자회사 자드와는 사우디의 올해 정부지출 증가율이 19%로 최근 6년간 최대치라고 지적했다.

이동훈 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