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태일 (13) 1000일 기도 끝에 ‘즐거운 집’ 판잣집을 벗다

입력 2012-01-17 18:16


고난 없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고난을 당할 때면 억울해하다가 그게 걸림돌이 되어 폐인이 되는 이들이 더러 있다. 반면 그 일을 승리의 디딤돌로 삼는 이들도 있다. 나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한다. 하나님께서 선한 마음으로 고난에 맞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심에 나로선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는 구절로 모든 일에 말씀을 앞세우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다.

비록 온전히 따르지는 못했어도 말씀을 앞세운 모든 일들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 하지만 하나씩 이루어져 가는 일을 보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히 확인했다. 인천 일신동 재개발지역에 있는 ‘즐거운 집’이 동양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은 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처럼 처절했다.

나는 즐거운 집 가족들을 위해 비닐하우스나 판잣집을 연이어 짓다보니 제법 전문가의 경지에 들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건물은 언감생심 제대로 지을 꿈도 꾸지 못했다. 도면도 볼 줄 몰랐고 땅을 어떻게 사며 또 어떤 건축업자가 일을 해야 하는지 완전 무지했다. 그런 내가 1992년 2월 한 푼의 돈도 없이 즐거운 집 이전을 위한 연속기도를 기약 없이 시작했다.

역시 기도의 힘은 놀라웠다. 그 해 9월에 동양동에 땅 340평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건축설계사를 하시는 박성주 집사님이 설계도와 함께 조감도를 주셨다. 나는 며칠 동안 그 조감도를 안고 들떠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곤 조감도를 곳곳에 붙여 놓고 연속기도를 이어갔다. 하나님의 응답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땅을 살 수 있게 해 주시더니 설계를 하게 하시고, 건축업자를 만나게까지 해주셨다

단계별 기도 응답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나를 힘차게 흔들어 나의 믿음을 테스트하셨다. 하지만 갓 신학교를 들어간 나로서는 하나님의 깊고 크신 뜻을 알지 못했다. 그때부터 믿었던 사람들이 소리 없이 떠나갔다. 먼저 같은 신학교를 다니던 건축업자가 떠났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운운하던 그는 심적·물적인 큰 피해를 끼치고 떠나버렸다. 이어 한 봉사자의 남편이 건축을 맡았다가 그마저 갑자기 소식을 끊어버렸다. 그 다음 “건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반드시 자신이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던 한 장로님은 기초공사만 하고는 떠났다. 그때 나는 참 많이 울었다. 길을 걸어도 눈물이 났고, 하늘을 봐도 눈물이 났다.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붙잡고 울었다. 그냥 눈물이 났다. 한마디로 온전한 내 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엄청난 고난을 이기게 해 주셨다. 문제해결의 가능성이 단 1%도 안 된다고 여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순식간에 역전의 상황을 만들어주셨다. 그때의 상황을 차마 지면으로 밝힐 수 없어 안타깝다. 어쨌든 절대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반드시 지을 수 있는 상황으로 반전됐다. 결국 즐거운 집은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 사탄의 방해를 뚫고 완공됐다.

내 영혼을 송두리째 앗아 갈 만큼의 고통을 남기고 4명의 직분자가 떠난 뒤 신학교 동료 양창규 목사(당시 강도사)가 헌신적으로 수고해 감격적인 완공을 이루었다. 단 한 푼도 없이 즐거운 집 이전을 위한 기도를 시작해 1000일을 경과한 끝에 작품을 만들어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어디를 가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한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라는 단순한 믿음으로 시작한 기도가 결실을 맺었다. 1000일 기도 감사예배를 드린 그 날, 1994년 12월 5일이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