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권태일 (12) 버림받은 이들의 어머니가 된 아내 홍현송 사모
입력 2012-01-16 17:5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어렵사리 ‘즐거운 집’을 열고서 본격적으로 나눔의 삶에 투신한 뒤 나는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온몸으로 붙들었다. 죽음과도 같은, 아니 죽음보다도 더 처절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과 살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돼야만 했다.
그래도 어려웠다. 말이 고통당하는 이들과 같이 사는 것이지 그들과의 공동체 생활은 참으로 쉽지 않았다. 대부분 거리를 헤매던 그들인지라 자신의 육신 하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다. 하나에서 열까지 챙겨주고 관리해주지 않으면 안 됐다. 열심히 한다고 해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고가 터졌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아픈 기억 때문에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이들은 가슴으로 감싸 안으며 함께 아파해야 했다. 지난날 입었던 각종 상처와 그로 인한 증오로 울부짖는 이들에겐 두 손을 맞잡고 함께 울어줘야 했다. 무엇보다 욕심과 악습이 몸에 밴 이들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살기는 참으로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하셨던 것인가.
나의 사역을 말할 때 아내 홍현송 사모를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야간 신학교를 다닐 때 아내는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내가 종일 밖으로 나돌아야 했으니 젊은 나이에 가정을 혼자서 책임져야만 했다. 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겠다는 일념으로 미쳐 있었으니 말이다. 감사하게도 아내는 남편의 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지금도 가끔 지난날을 회고하면 주위 사람들이 “사모님이 더 훌륭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야 내 일이니까. 내 사명이니까, 내 운명이니까 그런다 치지만 아내는 그게 아니었다. 남편 잘못 만난 ‘덕분’에 생고생을 해야 했다. 전과자에서부터 알코올 중독자, 각종 장애인, 살 곳을 잃은 여인과 아이들…. 아내는 이들의 사연을 들어주면서 때로는 이들과 같이 울고 싸워야만 했다. 하루 24시간을 이들과 더불어 생활해야 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일은 진행됐다. 하지만 열정 하나만으로 그런 일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가족들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한데 내 형편으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탓에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나가는 가족들이 생겼다. 그러면 이들을 찾아 나서 길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때 내가 가진 재산이라곤 달랑 집 전세금 300만원뿐이었다. 이 돈까지 빼서 계속 판잣집을 보완하면서 생활비로 썼다. 나와 아내의 절박한 심정을 누가 헤아리겠는가만 우리 부부는 우리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만은 우리를 감찰하고 계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분이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도우셨기에 지금까지 24년을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었다.
보통 이런 사역을 하게 되면 부부가 같이해도 쉽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공동체 관리는 거의 아내 혼자서 떠맡았고 나는 더 어려운 이들을 찾아 다녔다. 그럼에도 아내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래서 지금의 사역에서 조금이라도 칭찬을 받을 게 있다면 당연히 아내 몫이다. 밤늦게 집에 들어가서 파김치가 돼 쓰러져 자고 있는 아내를 보고 눈물 글썽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여보, 정말 고맙소.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하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