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46) 초기 한국감리교회의 신학
입력 2012-01-15 18:05
타종교 많은 선교현장에 신학적 접근
한국장로교회의 경우 한국인에 의한 신학활동은 1930년대에 시작되지만 감리교는 이보다 훨씬 앞선 1900년대부터 시작된다. ‘신학’(theologia)을 그 시대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때 감리교가 장로교보다 한국인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앞섰다는 점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것은 감리교의 신학적 자립 의식이 장로교 보다 앞섰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장로교에 비해 선교사 수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감리교회가 선교현장에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국인 지도자들의 활동을 시급하게 요청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감리교회는 1900년 12월 한국에서의 첫 신학저널인 ‘신학월보’를 창간했다. 1901년부터 한국인의 신학논문이 게재되기 시작하면서 한국인의 신학활동이 개시됐다. 평신도였던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은 창간 이듬해인 1901년 ‘죄의 도리’라는 신학논문을 게재했다. 그가 기독교에 입문한지 8년만의 일로 이것이 한국인의 첫 신학논문이었다. 이 글은 비록 6쪽에 지나지 않는 단문이지만 복음서와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본문 삼아 주인과 나그네의 대화 형식을 빌려 죄의 유전설을 말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1902년 5월, 김창식과 김기범에 이어 한국감리교회의 3번째 목사가 되다. 1903년에는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한국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인 정동교회 담임목사가 된다. 목회활동 중에서도 신학 활동을 계속했는데, 1907년부터는 신학월보에 ‘셩산유람긔’(聖山遊覽記)를 연재했다. 1912년에는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성산명경’(聖山明鏡)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유불선과 기독교 진리에 대해 네 사람의 대화 형식으로 쓴 논문이었다. 1909∼1901년에는 ‘사교고략’(四敎考略)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가 말한 4가지 종교란 공자교, 회회교, 힌두교, 불교였다. 말하자면 동양종교에 대한 논구였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13회에 걸쳐 신학세계에 ‘종교변증설’을 연재했는데, 이것이 1922년 ‘만종일련’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세계의 종교를 망라하여 취급하고 있다. 특히 한국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두 종교인 유교와 불교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최초의 세계종교사 연구라고 할 수 있지만 기독교 입장에서 세계종교를 논한 선교신학적 비교종교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자 출신의 최병헌은 유동식의 지적처럼 일생 동안 재래종교와 기독교간 만남의 문제를 해명하는 일에 몰두 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신이 30세에 이르기까지 유학에 정진해왔으므로 기독교에로의 전환에 대한 실존적 성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유(儒) 불(佛) 선(仙) 등 동양 종교적 상황에서 기독교를 전파해야하는 현실적 필요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재래종교에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타종교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으나,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타종교와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모든 종교를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 있는 문화현상으로 보았으며 그 모든 종교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다고 보는 입장을 취했다. 이 점을 유동식은 “만종(萬宗)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다른 종교들은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예비적 진리,’ 곧 몽학선생이라는 입장이었다.
최병헌은 만종일련에서 이렇게 말한다. “동일한 구주 예수 기독께서 대인속죄(代人贖罪)하심을 신앙하며 천지만유의 대주제 여호와를 숭배하나니…. 문호를 각립(各立)하여 호상불합(互相不合)함은 실로 가탄할 사(事)이라.” 이런 입장이 황성기독청년회 등 연합운동에의 참여에 불을 붙인 이념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탁사 최병헌은 ‘한국최초의 신학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종교의 진리는 천상천하에 하나이오, 고왕금래(古往今來)에 둘이 없는 것이다”라는 전제에서 모든 종교가 하나로 성취된 바가 그리스도 복음이며 기독교라는 그의 신학은 정경옥,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으로 이어지는 한국 감리교신학의 특징이 되고 있다.
감리교의 신학교육기관은 신학반(1893), 신학회(1899) 등의 과정을 거처 1907년 협성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된다. 1915년부터 이 신학교 최초로 한국인이 교수로 임용됐다. 그가 양주삼(梁柱三, 1879∼1950)목사였다. 한학을 공부하던 그는 윤치호의 안내로 중국 상하이에서 짧은 기간 수학하고 미국으로 가 1910년 밴더빌트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예일대학에서 수학한 후 1915년 귀국했다. 곧 구약학 교수로 채용되었다.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장로교 신학교가 한국인 교수를 받아들인 때보다 12년 앞서는 일이었다. 그의 교수활동은 2년에 불과했다. 양 목사가 주로 목회 혹은 교회 행정가로 일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916년 ‘신학세계’를 창간하고 성경개론에 해당하는 ‘구신약전서총론’을 한국인 최초로 신학세계에 연재했다. 기독론, 찬송가 연구 등에 대해서도 한국인 최초로 글을 발표했다. 그는 신학자라기보다는 목회자로 한국인 초대 감독으로 감리교회 형성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그는 초기 감리교 신학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앞에서 언급한 최병헌은 은퇴한 이후인 1923년부터 협성신학교 교수로 일하게 된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감리교에서는 장로교 보다 앞서 한국인들의 신학활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리교는 장로교와는 달리 초기부터 신학적, 교리적으로 개방적이었다. 특정 신학이나 사상만을 고집하지 않고 신학적 다양성을 인정했다. 양주삼은 1916년 당시에 모세오경에 대한 양식비판, 혹은 고등비판을 수용하고 소개할 정도였다. 이런 신학적 포용성이 감리교를 덜 분파적이게 만든 내적 요인이었다.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