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대륙을 가다] 도둑갈매기 서식환경 조사 “생태계 해칠라…” 조심조심
입력 2012-01-13 18:46
남극 테라노바시 장보고동에서 새해 들어 ‘2012 인구주택 총조사’가 진행됐다. 1월 2일부터 1주일간 진행된 조사는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의 노태호 전동준 박사 두 사람이 맡았고, 조사 대상은 남극 도둑갈매기(스쿠아)였다. 낯선 조사원들의 가가호호 방문에 주민들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온갖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두 박사는 꿋꿋하게 맡은 바 일을 완수했다.
#스쿠아 개체 수, 남극 환경보호의 척도
남극 도둑갈매기, 부정적인 이미지의 ‘도둑’과 흔해빠진 ‘갈매기’가 합쳐진 이름 탓에 하찮은 새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스쿠아는 이 지역 먹이사슬 정점에 있는 포식자다. 날개를 활짝 펴면 1m 정도 되며 새끼 펭귄과 바닷속 작은 동물 등을 잡아먹고 산다. 다 먹은 펭귄 뼛조각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둥지도 눈에 띈다.
1월은 스쿠아 새끼가 태어나는 시기다. 어떤 둥지에는 솜털이 보송한 새끼가, 어떤 둥지에는 알이 있다. 그래서 어미 새의 신경이 매우 날카롭다. 침입자가 둥지 50m 이내로 들어오면 부부 한 쌍이 흡사 비명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한다. 더 가까이 다가오면 낮은 위협비행으로 달려든다. 특히 장보고기지 예정지 인근에 있는 독일 곤드와나 기지 주변은 스쿠아 서식 밀도가 매우 높다. 경고 울음소리가 입체 서라운드로 들리고, 약 10마리 정도가 하늘에서 위협을 가한다. 날개에 얻어맞는 일도 생긴다. 이런 위협을 무릅쓰고 새 숫자를 세는 이유는 뭘까?
장보고기지 예정지의 최대 생태적 특징은 ‘스쿠아 밀집지역’이란 점이다. 2년간에 걸친 기지 공사기간 중 발생하는 각종 소음과 중장비의 진동은 이들의 서식환경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친환경’을 내걸고 설치되는 풍력발전기조차도 스쿠아의 비행에 방해가 되고 풍력발전기의 날개는 스쿠아의 목숨을 빼앗는 무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 기지 공사로 인해 최고 포식자의 개체 수가 줄어든다면 이 지역 먹이사슬은 파괴되고 생태계 균형도 붕괴된다. 때문에 현재 몇 개체가 있는지 확인한 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미리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래서 두 박사는 1주일에 걸쳐 하루 종일 기지 일대를 돌며 스쿠아 개체 수를 확인했다. 조사 결과 장보고기지 반경 약 2㎞ 내에 사는 스쿠아는 78쌍으로 조사됐다. 갓 부화한 새끼가 68마리, 알은 22개다. 앞선 2년간의 조사 결과와 큰 차이가 없다.
장보고기지 건설 활동은 단순히 건물만 짓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쿠아 개체 유지 등 남극 환경을 보존해야 할 의무도 이행해야 한다. 노 박사는 “남극조약(Antarctic Treaty)의 근본 목적은 남극의 자연환경과 자원의 보호”라고 강조했다. 남극을 훼손하고 파괴해서 기지를 만들어야 한다면, 그 기지는 없느니만 못하다. 기지뿐만 아니라 공사 과정 전반도 친환경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두 사람은 스쿠아 외에 공사로 인해 발생하는 소음과 대기질 등 변화 상황과 기지 운영 중 발생하는 환경영향 요소를 예측해 ‘포괄적 환경영향평가서(CEE)’ 본안을 작성한다. 본안은 우리나라 환경부와 6월 호주에서 열리는 제35차 남극조약당사국회의(ATCM)에 제출되고, 장보고기지 건설의 최종 승인을 결정짓는 자료로 활용된다. 아직까지 장보고기지의 건설 승인은 확정된 게 아닌 것이다. 두 사람은 장보고기지가 남극보호라는 본연의 목적에 어울리는 기지가 될 수 있도록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다.
#남극대륙은 지의류의 땅
아라온호에 탑승한 극지연구소 관계자들은 김예동 남극대륙기지건설단 단장을 포함해 모두 15명. 이들은 다양한 주제의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루 종일 걷는다는 점에서 노현주 연구원의 하루는 KEI 박사들과 비슷하다. 그의 연구 분야는 지의류(地衣類). 땅 위에 붙어사는 지의류는 식물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곰팡이 등 균류(菌類)와 조류(藻類)의 복합체다. 기지 예정지 주변에선 바위에 거뭇거뭇 붙어있는 지의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검은색을 띤 움빌리카리아가 가장 많다. 외국의 문헌에 따르면 테라노바 만에 사는 지의류는 22종, 이끼는 4종이다. 종류에 따라 1∼10년에 1㎜ 정도 자란다. 눈에 보이는 지의류는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성장한 것들이다. 영국의 탐험가 로버트 팰콘 스콧이 100년 전 테라노바 만을 발견했을 때나 지금이나 지의류 크기는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노 연구원은 하루 종일 기지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지의류를 찾는다. 이번 활동기간 동안 70개의 샘플을 확보했다. 아라온호로 돌아오면 그날 채취한 샘플을 보존하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환경이 달라지면서 발생하는 변화를 막기 위해 그날 샘플은 그날 처리해야 한다. 또 배양용과 분자생물학 분석용 등 한 샘플도 다양한 목적에 맞게 여러 번 보존 작업을 해야 한다. 꼼꼼하게 기록하고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6시간. 하루 일을 끝내다 보면 시계는 어느새 새벽 2시를 넘어간다.
기지 주변에 어떤 종류가 사는지 확인하는 것이 첫 번째 연구 목적이다. 또 이들 지의류가 왜 이런 극한 환경에서 자라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도 주요 연구 이유다. 응용분야도 많다. 남극의 지의류들은 남극의 강한 자외선을 잘 견딘다. 이런 성질을 분석해내면 자외선 차단기능이 강화된 화장품 등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얼음 바다 속엔 누가 살까?
바닷속 생물도 연구대상이다. 사상 최초로 기지 앞바다 조사도 이뤄졌다. 바닷속 생물을 연구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웬걸, 2.5m 두께의 얼음이 바다 위를 뒤덮고 있다. 아이스드릴과 해머 등으로 꽝꽝 언 얼음을 깨는 데 3일이 걸렸다. 연구 책임자 김지희 박사의 주업무도 곡괭이질이 됐다.
4일째에야 두 명의 노련한 잠수부가 두꺼운 해빙 아래 어두컴컴한 영하의 바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남극 바다 수온은 영하 1∼2도. 손을 담갔더니 10초 만에 칼날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 보호장비가 있어도 5분만 지나면 손의 감각이 없어진다. 잠수부가 물속으로 들어간 지 10분이 지나면 산소호흡기 호스가 얼기 시작한다. 산소호흡기를 물어야 하는 입 주변만큼은 맨살이 드러나 있다. 물에서 나오자마자 뜨거운 음료를 마시고 따로 데워둔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 몸을 녹여야 한다.
이들이 3일간 6번의 고생스런 다이빙을 통해 얻은 성과는 많다. 우선 해저 지형이 완만하게 이어지다가 수심 10m부터 급격히 깊어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수심 15m 이하부터 생물 숫자가 풍부해진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들은 또 남극가리비와 남극큰띠조개, 성게와 말미잘, 남극대구와 다양한 크기의 불가사리 등을 건져 올렸고 이 지역에서 해면동물(海綿動物)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생물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기지 부두 예정지의 바다 상태도 조사됐다. 부두 예정지에는 생물군이 많지 않아 환경 파괴가 심하지 않고, 뻘도 거의 없어 공사할 때 부유물이 생길 가능성도 낮은 편이다. 이 자료는 시공사인 현대건설에 제공된다.
실패의 쓴맛을 본 팀도 있다. 국내 최초로 빙하를 100m 이상 시추하려던 빙하팀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빙하팀은 세밀한 사전 문헌조사와 고산지대 실전테스트 등 철저한 준비를 거쳤지만 남극의 현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교과서는 1300㎢에 달하는 거대한 대륙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고 실전테스트를 했던 얼음과 남극의 빙하 상태는 상당히 달랐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과학의 진전은 언제나 숱한 실패 위에 이뤄져왔다. 강정호 박사는 “한국에 돌아가 부족했던 부분들을 개선해서 다음에는 성공하도록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 밖에도 장보고기지 주변의 해저지도를 그리는 해저지형팀, 남극에 떨어진 운석을 수집하는 운석연구팀 등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세상의 끝에서 미래를 열어가겠다”는 슬로건 아래 극지연구소 연구원들의 연구는 계속될 것이다.
남극 테라노바 만=글 김도훈 기자 사진 이동희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