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보수가 성공하려면

입력 2012-01-12 18:14


요즘 들어 부쩍 눈에 띄는 우리 사회 현상 가운데 하나는 보수보다 진보가 좀 더 그럴듯해 보여 그런지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는 점이다. 보수보다 진보를 지향하는 출판물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이 같은 현상의 방증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진보정당의 국민지지도는 보수 또는 자유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정당에 비해 형편없이 낮다. 한국정치의 미스터리다.

그렇지만 좀 막히고 답답해 보이는 이미지를 갖고 있더라도 보수의 가치는 소중하고 이를 충분히 지킬 만한 이유도 있다. 이런 점에서 여당이 당의 강령에서 ‘보수’를 빼려다 멈춘 것은 잘 한 것 같다. 사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강한 유교권 문화에 속해 있는 한국은 생래적으로 보수가 강한 곳이다.

프랑스혁명은 폭동에 불과

보수라는 용어는 영국의 정치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1729∼1797)경이 프랑스혁명의 과격성을 비판하고 경고하면서 사실상 처음으로 사용됐다. 파리의 신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이란 책(1790년)에서 그는 유기적으로 성장한 생태 시스템으로서의 사회가 폭력적 혁명의 개입으로 혼돈과 폭정의 상태로 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프랑스혁명은 굶주린 대중과 폭도들이 유산자들의 재산을 빼앗은 일종의 폭동이란 것이다. 근대 혁명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 혁명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 전말을 보면 성공한 혁명은 아니다. 혁명의 결과 공화정이 온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으로 상징되는 제정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대부분 프랑스혁명을 부정적으로 본다.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도 ‘자유의 적들’이라는 책에서 이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라고 못 박고 있다. 혁명(革命)의 원래 뜻은 말 등 위에 얹는 가죽으로 된 안장이 다 낡아서 새것으로 교체한다는 것이다. 가죽이 목숨을 다했기 때문에 새것으로 바꿨는데 이것이 잘 맞지 않아 예전 것만 못하다면 그것은 실패한 것 아닌가.

문제는 보수가 진보에 대한 방어적 개념이기 때문에 변화에 소극적이고 전통을 중시하지만 미래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진보는 확실한 유토피아가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같은 고장이 있지만 보수는 이것이 부족하다. 그래서 외견상 소극적으로 보이고 정열이 없어 보인다. 때로는 기득권만 옹호하는 반동(反動)으로 비치기도 한다.

이것이 더 심해지면 우리 사회에서는 수구 꼴통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우선 보수가 성공하려면 책임의식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반드시 지켜내야 할 전통적 가치를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한 소명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가령, 정권을 잡았다면 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의 프랑스와 같은 국면을 아예 만들지 말아야 한다.

책임과 희생정신 뒤따라야

그 다음으로는 가진 사람의 자발적 의사에 기초한 희생 정신이다. 국가가 법으로 정해 부역을 부과하기 전에 스스로 공동체에 기여할 바를 찾는 것이다. 미국의 부자들이 버핏세를 신설할 것을 촉구하고 스스로 세금을 많이 내겠다고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 부자들도 빈부차이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면 갈등의 골이 깊어져 혁명적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았을까.

희생정신의 로마식 표현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니겠는가. 이와 함께 변화를 무시하지 않고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전통적 가치를 지켜 나간다면 보수는 절대 실패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다 열정과 정열을 좀 보탠다면 금상첨화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