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으로 본 기독교 100년-우순소리] 이솝우화 통해 일제와 무능한 조선 정부 비판
입력 2012-01-12 16:30
우순소리 (윤치호 엮음, 대한서림 발행, 1908)
‘우순소리’는 윤치호(1865∼1945)가 이솝 우화와 프랑스 작가 라퐁텐의 우화 등을 번역하거나 재창작하여 소개한 책인데, 우화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와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 정부를 비판한다. 보통 우화집과 달리 일부 우화의 끝에 엮은이의 촌평을 달아 교육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몇 가지 예를 소개한다.
어미 개구리가 새끼 개구리에게 황소보다 큰 체하려고 자신의 배를 부풀리다가 결국 배가 터져 죽는다는 우화 ‘개구리와 황소’에 대해, 윤치호는 “강한 나라 칭호와 예식만 흉내내다가 망한 나라도 있다지”라고 촌평했다.
젊은 독수리가 병들어 죽게 되자 어미 독수리에게 명산대찰에 기도하여 병이 낫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어미 독수리가 ‘명산대찰에서 도둑질만 했는데 그 누가 기도를 들어주겠느냐’고 나무랐다는 우화 ‘수리의 지각(知覺)’에 대해선 “임금을 속이고 백성을 학대하여 나라를 망하게 해놓고 불공과 산천 기도로 나라 잘 되기를 비는 사람들은 이 독수리 지각만 못하도다”고 비틀었다.
매일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죽여서 배를 가르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는 우화 ‘금알 낳는 거위’에 대한 촌평에선 “백성을 죽여가며 재산을 한 번에 빼앗다가 필경 재물과 백성과 나라를 다 잃어버린 사람들도 적지 않아”라고 일갈했다.
‘우순소리’는 당시 언론에 “애국 사상을 일으키며 독립정신을 배양하는 비유 소설”로 여러 차례 광고되었고 1910년에도 재차 간행되었다. 하지만 결국 일제의 ‘교과서 검정법’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고 말았다.
윤치호는 16세 때인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신학문과 영어를 배웠고 2년 후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해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884년 12월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Anglo-Chinese College)’에 입학했으나 개혁 실패의 좌절감에서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근대학문을 닦으며 경건한 삶의 자세를 견지했고 1887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남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다.
이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895년 정부의 학부 협판(차관급), 외무부 협판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이후 서재필과 함께 국민운동에 나서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회장, 대한자강회 회장 등을 맡아 크게 활약했고, 애국가 가사를 지었다. 민족운동을 탄압하고자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1911년)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교육에도 힘을 쏟아 실업교육을 강조한 한영서원 초대 원장,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원 교장, 연희전문학교 교장 등을 맡았다. 윤치호의 ‘우순소리’ 역시 청소년 교육 교재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후 윤치호는 3·1운동을 반대하고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친일 쪽으로 기울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일본 귀족원 의원 등을 맡았다. 결국 해방 후 친일파의 대표로 비판당했고 1945년 12월 별세했다.
윤치호는 ‘우순소리’ 외에도 한국인 최초로 개신교 찬송가인 ‘찬미가’를 펴냈고, ‘의회통화규칙’과 ‘걸리버여행기’ 등을 번역했다. 특히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여 년에 걸쳐 쓴 ‘윤치호 일기’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한국 역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자료로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부길만 교수(동원대 광고편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