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꿈 넘나들다 책갈피에 빠진 그녀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입력 2012-01-12 18:45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슈테판 볼만/웅진지식하우스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는 “독서는 은밀하게 나 홀로 즐길 수 있는 고립의 시간을 준다. 책은 나를 빨아들이고 마음의 먹구름을 지워준다”고 말했다. 책 읽는 순간만큼은 책과 나 사이에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화려한 고립을 즐긴 뒤 책장을 덮고 나면 ‘나’는 책을 읽기 전,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책은 기본적으로 전복적인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책 읽기는 남성들에게 위협적인 행위로 다가왔다. 중세의 남성들은 책 읽는 여자들에게서 현실에 얽매인 굴레를 벗어던지고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갈망하는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여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읽을 수 있는 자유를 갖기까지 수백 년의 세월이 걸렸다.

권력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독서에 몰두하는 것을 일종의 정신병으로 몰며 여자와 아이들이 책에 탐닉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18세기엔 소설 표지에 의례 실과 바늘이 끼워져 있었다. 여자들에게 그녀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달라졌다. 가정이라는 좁은 세계를 상상력과 지식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세계와 맞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이 책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13세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화가들은 책 읽는 여자에게 매혹됐다. 미켈란젤로의 ‘쿠마이의 무녀’, 렘브란트의 ‘책을 읽고 있는 노파’, 페르메이르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여인’ 등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명화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왜 화가들은 책 읽는 여자에게 매혹되는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실용적이고 학구적인 독서와는 정반대로 새로운 독서행위는 제어하기 힘든 거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목적이 책 읽는 사람의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것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독서에는 시간과 날짜가 계산되는 학습 시간이 아니라, 그때그때 생겨나는 감정적 체험의 밀도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32쪽)

책 읽는 모습엔 독서를 통해 생겨나는 자아 존중의 감정이 넘쳐나기에 화가들은 그 순간을 포착하려 했던 것이다. 피렌체의 화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1859∼1933)의 ‘꿈’(1896년 작)엔 젊고, 꿈꾸는 듯 쳐다보고, 생각에 몰두한 여자가 가을 벤치에 앉아 있다. 벤치엔 책 세 권과 모자, 그리고 양산과 장미가 놓여 있다. 바람에 날려 땅에 뒹구는 나뭇잎과 모자와 양산은 하나의 소품일 뿐, 이미 책 읽기를 마친 그녀의 시선은 존재의 덧없음을 생각하며 초점 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막 작별한 여름은 젊은 처녀를 자의식이 강한 여인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독서가 그 일에 일정한 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장미는 책갈피로 사용된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동경하는 것은 순진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179쪽)

중세의 여자들은 책 속에서 현실 너머의 세상을 발견했고 빠른 속도로 책에 매료됐다. 이제 책 읽는 여자들은 위험해졌다. 가정에 대한 순종을 벗어 던지고 독립적 자존심을 얻었기에 그녀들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취급됐다. 덴마크의 화가 빌헬름 하머스호이(1864∼1916)의 ‘편지를 읽는 여인이 있는 실내 풍경’(1899년 작)에서 여인은 열린 문과 닫힌 문 사이에 서 있다. 여인의 내면은 열린 문 쪽, 즉 외부 세계와 연결된다. “편지조차도 알 수 없는 어떤 곳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편지도 어느 정도는 자신만을 암시하는 일종의 문이다.”(196쪽)

사진작가 이브 아널드의 ‘메릴린 먼로가 율리시스를 읽다’(1952년 작)라는 사진을 보자. 아름다운 금발머리에 풍만한 몸매로 시대를 풍미한 섹스 심벌 메릴린 먼로가 20세기 현대 소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심취돼 있다. 그녀는 정말 ‘율리시스’를 읽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읽고 있는 척 하는 것일까.

궁금증을 제기한 문학교수 브라운에게 아널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메릴린은 자신이 그 책의 어조를 좋아하며 그것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리 내서 읽고 있지만 힘든 일이라고 말하더군요.”(243쪽) 사진을 찍기 위한 단순한 연출 장면이 아니라 메릴린은 한순간이나마 ‘율리시스’에 매료돼 있었다는 것이다. 책에 몰입하는 순간에 메릴린은 세계와 단절돼 있었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책 읽는 여자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녀들은 좀 더 영리해지는 것도, 이기적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여, 나이가 들수록 여자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면 스스로 한 권의 책이 돼야 한다. 여자들은 내 남자가 아직도 읽을 게 있는 책이기를 원한다. 저자는 독일의 출판원고심사위원. 조이한·김정근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